오늘 마주친 한 구절

[사서가 읽는 책]『사과나무 위의 죽음』

by 김보현

  • 『사과나무 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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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우 할아버지는 점점 더 약해졌어요. 

    온 몸이 아팠고, 한쪽 눈은 보이지 않게 됐으며,

    양쪽 귀는 아예 들리지 않았어요.

    사과향기도 맡을 수 없었어요.

    기쁨을 느끼는 법도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았답니다.

    어느 이른 아침, 여우 할아버지는 다리를 절며

    느릿느릿 사과나무를 향해 걸어갔어요.

    그러고는...

    "이제... 내려 와."

    하고 '죽음'을 풀어줬지요. p[28]

     

    움켜쥘 수 있는 모래알 수만큼의 생을 빌었으나 젊음을 부탁하는 것은 잊고 말았다던 쿠마이의 무녀 시빌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폴론의 사랑을 거부한 시빌레는 천 년 동안 서서히 늙어가며 육체는 스러지고 목소리만 남아 예언을 전했다.

    여우 할아버지의 친구들은 이미 오래전에 모두 죽고 없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그토록 아끼던 사과의 향기조차 맡지 못한다. 행복하다고 느꼈던 일들, 기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모두 잃고 나서야 여우 할아버지는 주문을 말했다. "이제 내려와."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어느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신화 속 시빌레가 젊음을 잊지 않고 청했다면, 여우 할아버지가 이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면 죽음은 얼마만큼 그들을 기다려야 했을까. (김보현 사서 2017.3)


    카트린 셰러, 박선주 역 『사과나무 위의 죽음』 푸른날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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