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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하철서재] 익명게시판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18-04-07 조회수 : 190

[경기도지하철서재] 익명게시판


지난해 언젠가부터 그전 같으면 ’(역)사상’이란 말이 쓰일 자리를 ’헌정사상’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헌정사 초유의 탄핵, 헌정사 최대 집회 같은 말이 흔히 쓰였다. 선거로 뽑힌 최고권력자가 부정을 저질러 대의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고 국민이 주권재민,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고자 나섰기 때문에, 그 주인증서인 헌법이 국민의 삶 한복판에 놓이게 된 것 같다. 국회도, 헌법재판소도 주인 눈치를 보았다. 언론과 여론조사에 가려진 채 이름만 있던 주인이 앞으로 나와서 그들에게 주인의 생각을 받아적게 했다. 그때 주인이 있던 자리가 광장이었다. 그즈음 주말에 이른 저녁을 먹고 서울행 광역버스에 올라 앞뒤로 앉은 동네사람들을 보노라면 그들이 모두 나와 같은 목적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광장에는 결코 계량할 수 없는 무수한 얼굴과 장면이 있었으나, 오만하고 무자비하거나 흉포한 주인이 아니라 자기 권리의 신성함과 명예를 아는 주인이 우세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인용한 직후 나는 동천역 서재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뒤 대선과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이 이어졌다. 내가 아는 이들 대부분이 하루 종일 뉴스채널에 귀를 열고 생활했었다. (그들 대부분이 후에 뉴스 금단 증상을 호소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동천역 서재에도 그 시대가 언뜻언뜻 얼굴을 내밀었다. 누군가 매주 <시사인>을 서가에 두었고, 이따금 태극기집회 전단지가 놓였다. 4월 어느 날엔 <5.18영상고발>(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사진과 북한군 사진을 나란히 배열하고 동일인이라 주장한 지만원 씨 소책자)이 놓여 있기도 하였다. 어떤 분들은 서재에 있는 일부 책을 불온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두 달여 뒤에 서재에서 여러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되었다.


동천역 서재에 게시판이 생긴 때는 6월 9일이었다. 우리는 전달의 대출책수, 반납책수, 대출자수, 다대출도서 정도를 담은 짧은 글을 서가 평평한 면에 붙이면서, 끝에다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달라고 덧붙이고 포스트잇을 마련해두었다. 깜짝 놀랄 속도로 응원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서재에서 마주친 분들한테도 같은 말을 들어왔지만 공개적인 메시지로 듣는 건 또 달랐다. 익명이지만 공개 발언이고, 지하철서재에 머무는 모든 이들이 읽는 것이니까.

한 달새 42개가 붙었다. 너도 나도 응원의 말을 이어가서 ‘열기가 뜨거웠다'고 해도 좋을 법했다. 대부분 이름과 날짜는 적지 않았다. 작은 쪽지들이 다닥다닥 붙은 게시판을 보면 한꺼번에 내는 목소리 같아 보인다. 그런데 하나하나 쪽지가 붙는 순간에는 엄연히 발언 차례라는 것이 작용한다. 적어도 글을 남기려는 사람은 그때까지 붙은 메시지를 모두 읽었을 것이니까.

게시판을 열고 6일째 된 날 다른 방향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건 반납 들어온 <소수의견>(용산참사를 모티프로 쓴 손아람의 소설로 2015년에 영화화) 표지 안쪽에 붙어 있었다.


“들어라! 약자는? 없어서, 작아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이다. 용기는 헤쳐나갈 수 있는 폭풍우보다 더 큰 힘과 위력을 가지고 있다. 소수의견, 그것은 위대하다. 용기가 중요하다.”


그때 이 쪽지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가 곧바로 떼어 보관하고, 이 새로운 발언을 게시판에 어떻게 정리하나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나흘 뒤 <눈먼 자들의 국가>(시인, 작가, 평론가, 연구자가 세월호를 겪으며 쓴 소설, 수필, 평론을 묶은 책) 표지에 읽은 소감을 적은 쪽지가 2장 붙었다.


“지나치게 국가를 비하하는 작가들의 생각임. 동서고금을 통해 좋은 지도자란 없다. 선택하고 후회하는 것밖에”

“지나치다고, 생각이 아닌 지도자를 잘못 선택한 국민 모두의 잘못을 비꼬는 생각”


이틀 뒤 책 읽은 후기 게시판을 따로 만들어 이 쪽지들을 책 표지 이미지와 함께 붙였다. 바로 그날과 그 이튿날 계속해서 쪽지 의견이 붙었다.  


“자본주의에 무너진 법 권력에 의해 짓밟힌 시민 약자가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견이 다수에 의해 무시당하는 부분이 문제임. ‘우리는 개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역사를 사는 것이다.’” (<소수의견>)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을 때, 바로 눈먼 권력자들과 기득권만 위해 존재한 때를 잘 표한한 책입니다. 잊지 않을 2014년 4월.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눈먼 자들의 국가>)

“그리 말하고 계시는 you는 진정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냐고 자문해 보시죠!” (<눈먼 자들의 국가>)


6월 21일 오전에 마지막 쪽지를 보고, 어찌할까 잠시 생각하였다. 같은 책에 맨처음 붙은 쪽지에 대한 의견이었다. 책에 대한 의견인가 아닌가 하는 단순한 기준을 세우고, 떼어내 보관하였다. 글쓴이가 양해해주기를 빌었다.

다음날 <동물에 대한 예의> 책 옆에 “사람에게도 못하는 예의를 동물에게/예의도 모르는 인간들아…” 라는 쪽지가 붙었고, 다음날 그 아래 새로운 쪽지가 붙었다. “동물보다 못한 인간도 반성해야 한다.”

광장의 공기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2018.3.10.)

 

* 이 글은 지하철서재를 매주 순회 방문하며 일하는 글쓴이가 서재에서 보고, 듣고, 만나고, 생각한 것을 적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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