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보도된 느티나무

[LG사보 느티나무] 아파트 속 동화의 나라(2002.12)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05-03-07 조회수 : 5,037

LG 그룹 사보 <느티나무> 2002년 12월호


<어릴 적에 살던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밑에서 어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장기를 두었고, 아이들은 제기를 차고 딱지를 쳤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느티나무 아래로 모두 모였다. 이곳에 오면 저절로 이웃을 만나고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풍덕천리. 아파트들이 밀집된 이곳에도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바람 불면 초록색 잎사귀가 춤을 추는, 그런 느티나무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마치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 모이듯 이곳에 모여든다. 아이들은 친구와 함께 오고, 엄마는 아이 손을 잡고 오고, 아빠는 아내와 아이가 뭘 하나 궁금해서 기웃거린다. ‘느티나무 어린이 도서관’. 세워진 지 3년 남짓밖에 안 됐지만 이제 풍덕천리에서 느티나무 어린이 도서관을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는다.
이 도서관을 세운 이는 일곱 살, 다섯 살 두 남매의 엄마인 박영숙 씨(36세). 대학시절 공부방 활동을 했던 그녀는 IMF 때 남편이 못 받았던 월급이 한꺼번에 나오자 그 돈으로 ‘사고’를 쳤다. 회원들의 입회비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만으로 운영하는 비영리 민간도서관이란 그야 말로 ‘손해보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지만 그녀에겐 확실한 꿈이 있었다.

“지식이나 정보를 누구나 똑같이 얻을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잖아요. 과외다 학원이다 사교육이 판을 치는 요즘 같은 때 책을 통해서라면 모두가 평등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매개로 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생각도 있고요.”
책을 사기 위해 젖먹이 둘째를 업고 안 다닌 데가 없다. 그렇게 3000권을 샀고 아파트 상가 지하에 도서관을 열었다. 하지만 오락실처럼 자극적인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조금은 허름하기까지 한 도서관에 아이들은 시큰둥했다.
“그래도 그냥 내버려뒀어요. 여기 와라, 와서 책 읽어라, 억지

로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욕심 많은 어른들이 아이에게 책을 억지로 읽게 하고, 독후감을 쓰게 하고, 뭘 배웠나 확인하려 드니까 아이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거죠. 태어나면서부터 책 싫어하는 아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책은 놀이고 재미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이들은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올 것이라고.”
그녀의 생각은 적중했다. 계단을 따라 그려진 재미있는 벽화에 이끌려 한두 번 발걸음을 했던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다 지치자 상가 지하의 ‘친절한 아줌마’를 떠올렸다. 아이들은 도서관에 와서 물을 마셨고, 놀다 다쳐도 집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 와서 약을 발랐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박영숙 씨가 읽어주는 책을 재미있게 여기기 시작했다. ‘책 읽는 그네’와 ‘이야기 의자’에 앉아 스스로 책장을 넘기는 일도 잦아졌다. 책과 아이들은 그렇게 친해졌다.


느티나무 도서관에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쉴 새 없다. 어느새 도서관은 아이들의 지혜와 꿈을 키우는 소중한 사랑방이 되었다.

아이들의 변화는 어른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아이와 함께 도서관을 찾은 엄마들은 ‘내 아이’ 옆에 ‘다른 아이들’을 함께 앉히고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5세용ㆍ7세용 책 몇 권을 읽혀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서서히 사라졌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즐거워진 것이다. 그뿐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아이들 간식거리로 빵이나 찐옥수수를 보냈고 어떤 이들은 자원봉사자가 되어 도서관 운영에 팔을 걷고 나섰다. 도서관이 동네 사람 모두에게 소중한 사랑방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고마운 일은 집이 못 살기 때문에, 혹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들이 학교나 이웃에서 왕따를 당하는 일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도서관을 열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가정에서조차 방치된 발달장애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교실이었거든요.”
한 시간에 한 번씩 운행되는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 ‘윗동네’ 아이들에게 도서관은 한마디로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다. 학교급식이 없는 날이면 으레 밥을 굶던 아이들은 도서관의 방과후 교실에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따라가기 힘든 학교 공부 역시 자원봉사 엄마들이 천천히 오랫동안 반복해서 가르쳐주는 덕분에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이상 소외 받지 않고 또래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있게 된 것도 큰 변화였다. 자신과 조금 다른 아이라는 판단이 서면 눈도 잘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아랫동네’ 아이들은 엄마들이 준비한 다양한 동아리를 통해 너와 나,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지 않고 함께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초등학생 어린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잖아요. 바다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 가능성의 덩어리인데, 어른들이 너무 가르치려 하고 원하는대로 만들려고 해요. 아이들이 스스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정해진 규격의 종이도 주지 않고, 얼마나 잘했는지 1등과 2등을 가리지도 않는 곳. 그저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곳. 아이들은 그런 느티나무 어린이 도서관을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어느새 9000여 권으로 늘어난 책들 속에서 쑥쑥 키를 키우고 지혜를 키우고 꿈을 키우고 있다.



(위) 지하에 설치된 느티나무 도서관 입구에는 미끄럼틀이 있다. 아이들은 미끄럼틀을 타면서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아래) 흔들그네는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다. 아이들은 그네를 타면서 동화책을 읽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