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주름
오늘날 정보는 지식을 대체하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인이 컴퓨터 안에 엄청난 양의 정보를 폴더 속에 저장하고 있지만, 막상 이 정보들이 지식으로 환원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기록의 방식이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기록을 정리해서 자신만의 질서로 배치하는 것은 마음처럼 쉬운 건 아니다. 이미 주어진 방식에 따라 정보를 정리한다고 해서 기록을 잘 정리했다고 단언하기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생각을 전개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타인의 생각을 참조하고 자신만의 질서로 재배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배치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그 이유는 관습이란 이른바 주류의 패러다임을 답습을 의미하는데, 자신만의 생각을 창조한다는 것은 다름 의미로 관습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러한 예로 들뢰즈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라이프니쯔의 철학을 다시 쓴 책이 바로 “주름”이다.
들뢰즈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는 단순히 특별한 선배 철학자의 궤적을 추적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쯔의 세계를 평면 위에 새겨진 주름으로 보았다. 이 주름은 세월의 흔적이자 경험의 축적이기에 마치 디스크 위에 새겨진 정보와 유사하다. 들뢰즈가 탐구한 수많은 철학자들,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그리고 푸코와 베케트까지, 그는 이미 기록된 역사의 궤적을 되풀이한 적이 없다. 그는 기념비적 형상의 표면에 새겨진 주름을 펼치고 다시 접는 방식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형상을 창조한다. 주름을 펼치는 행위(Déplier)는 안에 숨겨진 무엇을 바깥으로 꺼내는 행위로 겉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비밀을 여는 행위(ex-pli-quer)인 셈이다. 주름을 펴는 행위는 마치 과거를 지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들뢰즈의 주름 펴기는 성형수술이 아니라 현상을 파헤쳐 실체에 다가가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다. 또한 결과론적 인식이 아닌 과정을 통한 인식론을 펼치는 것이다.
사실 아카이브를 설명하는 기술적 방법론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필사본이나 희귀본의 디지털화, 인쇄물 수집 및 목록화, 역사적 사료, 예술품, 골동품 등 수집의 영역은 무한하지만 이러한 열정이 반드시 이해되지만은 않을뿐더러, 이러한 수집과 지식의 상관성은 오랫동안 불문율이었다. 20세기 중반 서유럽의 지식인들이 미술관 제도에 대한 저항적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카이브와 권력의 관계는 점차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지식의 고고학”에서 미셸 푸코는 “문명이나 문화, 사회와 관련된 아카이브가 속속들이 기술될 수는 없다. 게다가 의심할 나위 없니 전 시대의 아카이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아카이브 자체가 우리가 말하는 규범이자, 그것이 우리가 어떻게 말할 지를 지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우리의 담론의 목표가 만들어지기에, 모든 외형(모습, 세계를 인식하는)을 말하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들 자신의 아카이브마저도 기술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은가”라 피력한 바 있다. 푸코는 아카이브를 통해 지식이 생산되고 이 지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여겼다. 21세기가 열리면서 아카이브는 알 수 없는 열정으로 아카이브는 단순히 질서를 재편하고 이미 새겨진 의미를 재확인하는 작업은 아닐 것이다. 결국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위한 아카이브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방향일 것이다. 다시 쓰고 읽기란, 과거를 전복시키기 위한 혁명적 태도와는 다르다. 우리는 아카이브를 통해 어떤 배움을 가질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역사의 오류, 해석, 혹은 역사나 진리라는 관념이 생산되는 방식 등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는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그리스어 아르케(Arkhe)와 유사하다고 지적하면서, 이 단어는 ‘시작/기원’과 ‘(종교적) 계명’의 의미를 동시에 갖는 점을 주목한다. 시작의 의미는 자연사와 역사 및 존재론적 기원, 즉 연대기적 역사의 계열을 구성하는 것과 연결되고, 계명은 사회적 질서에 의한 제도화의 원리와 맞물린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리스어 아카이브는 집, 주소를 지시한다. 주소가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제도 내부에 위치한다는 것이며, 아카이브란 제도화된 기억과 기억의 흔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의 틀 에 맞추어진 이 기억들이 어떻게 새로운 (구별되는) 가치로 재배치, 재생될 수 있을지에 관한 노력과 의지일 것이다.
자신만의 질서를 통해 재배치된 사유의 공간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까 상상해보자.
느티나무도서관 관장 박영숙의 책 “이용자를 왕처럼 모시진 않겠습니다- 도서관, 시민이 탄생하는 제3의 공간”은 공공도서관이 이 사회에 어떤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지 되묻고 있다. 저자는 그저 공공도서관을 많이 짓는 것, 자료를 양적으로 모으는 것, 공공서비스의 장소로써 도서관이 아니라 이용자가 도서관이란 공공의 장소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나눠야한다고 전한다.
문화운동으로서의 도서관이란 거대도서관의 규격화된 분류법을 따르는 장소가 아닌 지역과 연결된 작은 도서관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공공도서관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그들에게 맞는 분류체계와 동선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질서란 이미 주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함께 만드는 것이란 단순한 진리를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