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회 한구절]『시인 신경림』
by 느티나무
절망감에 사로잡히면 찢어진 우산 따위를 뒤집어 쓰고 절을 지나, 언덕 밭을 지나, 과수원 사잇길을 지나 호수로 달려가곤 했다. 둑 마루에 서서 널따란 들판을 느릿느릿 달려가고 달려오는 기차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몰려오는 빗줄기를 보고 있으면 그래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트인 숨통 사이로 시간이 흘러 그의 비리고 아린 사춘기도 가물가물 멀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그는 입시 공부보다 더 유혹적인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를 만났다. 그의 <죄와 벌>을 읽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을 때 더 이상 ‘허연 허벅지’의 죄책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사춘기의 마지막을 문학의 광산 속으로 들어가며 보냈다.
가슴에 돋은 붉은 여드름 같던 그의 사춘기, 사춘기는 강물처럼 흘러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시(詩)로 복원된다 해도 결코 시는 삶이 아니어서. p.54-55
이경자 『시인 신경림』 사람이야기,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