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이사한 뒤로 밤낮없이... 몸도 마음도 고단한 날들이었는데 오늘은 하늘에서 펑펑 눈이 쏟아지는 것처럼 세상이 환합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ㅎㅎ 맘 먹고 자랑을 하기로 했으니, 이야기가 길어질 듯합니다.^^ 종환이 이야기 환이 얼굴을 본 건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새 도서관에는 처음 온 거였지요. 볼 때마다 한 뼘씩 키가 자라는 것 같더니, 가을 지내면서 표정도 깊어지고^^ 훤칠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얼굴에 흉터 아물 날이 없는 개구쟁이였는데 말예요..ㅎㅎ 모처럼 친구들이랑 왔기에 얼른 종필이네 치킨집으로 전화를 걸었지요. 사람들 안부도 묻고 도서관 둘러보며 잔소리^^를 해대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학교 다니는 걸 그렇게 못 견뎌했는데, 혹시 이젠 돌아가고 싶어 애태우는 건 아닐까... 무슨 사업을 벌인다는 소문이던데,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궁금한 게 가득하면서도 겨우 한 마디밖에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어디 아프지 않았어? 아버지도?" "똑같죠, 뭐.." 얼른 대답하는 걸 보니 집에는 들어가는 눈치고, 아버지도 그만하신가보다... 그렇게만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만나러 간다며 돌아간 환이가 금세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오늘 치킨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이제 자주자주 들를게요. 저 검정고시 공부할 건데 도와주실 거죠!!!!” 느낌표를 자그마치 네 개나 달았더군요.^^ 종필이 이야기 치킨을 들고 쏜살같이 달려온 종필이는 벙글 벙글... 말이 없는 녀석이 '완전 새 기름으로 튀겼다'는 홍보 멘트까지 덧붙입니다. 알고 보니, 사장님이 저녁으로 삼겹살을 먹는다 하셨다네요...ㅎㅎ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화까지 걸려와 확인을 시켜줍니다. “히히, 사장님인데요. 종필아, 고기 다 식는다~ 그러시는데요.” 치킨 먹던 아이들 모두 눈을 흘기는데도 아랑곳없는 종필이.. 내내 벼르던 압력밥솥만 가져가겠다고 챙깁니다. 올해 꼬박 일해서 번 돈으로 월세 방 얻고 냉장고도 샀다고 자랑을 해대더니 이제 정말로 밥도 제대로 해먹을 모양인지, 다음번에는 쌀이랑 김치까지 가져가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밥솥을 내주며 내친 김에 한마디 건넸습니다. "이제 일도 몸에 익은 것 같고 살림도 차렸으니 공부도 해볼까? 있잖아, 왜.. 그 재수 없는(?) 애들처럼 말고 진짜로 똑똑해지게...ㅋㅋ" 지나가는 말처럼 슬그머니 건넨 말에 "좋아요! 그러죠 뭐.." 뜻밖에 선선이 끄덕거립니다... 전부터 철학이랑 역사랑 공부해서 세상 보는 눈을 좀 길러보자 했었는데 올겨울에는 진짜 책 읽는 모임이 꾸려질 것 같습니다.^^ 배달함보다 더 큰 밥솥을 꾸역꾸역 실어 담은 종필이 혹시라도 밥솥 떨어질 새라.. 오토바이를 세발자전거처럼 살금살금 몰고 갔습니다. 수현이 이야기 좋은 날은 기분 좋은 일만 생기는 법인지... 아파트 앞 놀이터에 나와 기다리던 막내 승건이와 승진이, 수현이까지 한바탕 반가운 만남의 세러머니를 치르며 안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싱크대 앞에 선 승철이가 반깁니다. 달걀을 한 냄비나 삶아서 막 껍질을 까려는 참이더군요. 따끈따끈 기막히게 반숙으로 익은 달걀 하나씩 베어 물고 날아갈 듯 신이 났는데 이번엔 수현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꺼냈습니다. “있잖아요, 간장.... 우리 할아버지한테 가서 진짜 진짜 진짜로 잘못했다고, 죽을죄를 졌다고 그래 볼까?“ "......" 삶은 달걀이 꽉 메어 물만 들이켜는데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녀석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달걀껍질만 만지작대고 있었지요. 어느새 저런 용기를 냈을까... 현이는 고등학교 원서를 쓰던 무렵부터 한 달 남짓 더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분당 정보산업고등학교에 합격은 했는데... 멀리 안산에 있는 엄마네 집에서 다닐 일이 걱정이었지요. 녀석, 거의 15년만에 만난 엄마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도 만만치 않을 텐데 저런 용기를 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하기에.. "그래, 그래 보는 것도 좋겠다." 간신히 한마디 건네고 딴청입니다. 녀석, 언제 저렇게 자랐나... 수인이 이야기 동생이 어마어마하게 큰맘을 먹고 비장한 선언을 하는데도 여전히 노코멘트! 달걀만 먹어대던 수인이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간장, 나 그 책 다 읽었다요. 두 권 다!” 미즈타니 오사무의 책(랜덤클럽에서 가장 인기있는!...ㅋ)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늦은 밤, 잠 못 드는 아이들> 두 권을 며칠째 들고다니더니 정말 다 읽은 모양입니다. “수현이 니도 한 번 봐, 그거 읽을 만하더라”... 허걱! 모처럼 겨우 책 두 권 읽고 나서... '읽을 만하더라?!' 또 몇 달은 잘난 체하며 우려먹겠군... 웃음이 나오려는데.. 글쎄, 이 친구 어느새 <다빈치코드>까지 손에 들었더군요. 그걸 다 읽고 나면. 요사이 승철이가 코를 박고 있는 <나니아 연대기>를 볼 거라네요.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몇 주 하더니 정말 책에 ‘필’이 꽂힌 걸까...?$@! 암튼 두고 볼 일입니다. 원진이 이야기 한껏 들뜬 채로 컴퓨터를 켜는데, 어김없이 메신저에서 기다리던 원진이가 반깁니다. 원진이는 도서관 집들이하던 날 마이크 들고 나와 글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여러 사람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기도 했었지요. 오늘 진짜 천사처럼 예쁜 간호사 누나가 왔다면서 요즘 손이 모자라 한꺼번에 세 사람이나 밥 먹는 걸 거들어야 하는데 천사 누나가 도와줬다고 자랑을 합니다. 지난가을 사회봉사명령을 받아 다니고 있는 베데스다 요양원 이야깁니다. 법원에서는 그래도 소년원에 가지 않은 것만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막상 사회봉사 160시간이라면 귀찮고 지겨울 만도 한데... 이 친구, 이제는 봉사가 몇 시간 남았는지 따지지도 않습니다. 누가 봐도 법원에서 받은 명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곳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는 치석암에 걸린 할아버지 걱정으로 치석암이 어떤 병이냐 죽는 거냐 얼마나 아프냐 애를 태우더니 수술이 잘 되었다고 좋아라하면서... 지난번에 빌려간 책을 그 할아버지한테 잠깐 빌려드려도 괜찮겠느냐고 묻습니다. 원진이 덕에 느티나무도서관이 김포까지 배달서비스도 하게 된 셈입니다...ㅎㅎ 얼마전 술을 끊더니... 일주일째 담배까지...ㅋ 그 덕인지... 요사이 원진이는 만날 때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습니다.^^ “간장 말이 맞으려나 봐. 이제 진짜 다 괜찮고, 다 잘 될 것 같아.” 전에는 여름에도 아이 얼굴이 겨울빛이었는데... 올겨울에는 이렇게 스산하게 바람 부는 날에도 환하고 따뜻한 기운을 볼 것 같습니다. 준이 이야기 뒤이어 메신저에 등장한 친구는... 느티나무 맏형 준이. 도서관 집들이 하던 날 온종일 멋진 연주를 들려준 키 큰 피아니스트라고 하면 아실 거예요. 준이는 거의 날마다 메신저든 문자로든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데다가 늘 동생들 일로 애태우고 걱정하는 친구라 어서 아이들 이야기를 자랑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지요. 몇 마디 건네지 않아도 벌써 저쪽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친구 얼굴이 보입니다. 용케도 2년째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준이는 이번 학기부터 도서관을 공부해 보겠다며 문헌정보학 강의까지 듣고 있습니다. 지난주말에는 갑자기 고속버스를 타고 나타나서 도서관마다 어떻게 자료를 고르고 모으는지 조사하는 숙제가 있다며 국립중앙도서관이랑 수지도서관이랑 돌아보고 갔는데 이번엔 도서관 설계까지 한다네요. 8쪽이나 썼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면서도 내내 걱정을 하는데.. 기대가 됩니다! 느티나무 식구들은 벌써부터 방학만 기다립니다. 이 친구 와서 앉아있기만 해도 정말 든든하거든요...ㅎㅎ 일단 12월 15일... 기특한 동생들 다 모아 삼겹살 잔치 벌이자고 했습니다. 요사이 책 읽는 데 필 받은 동생들이 많으니 준이가 나서면 올겨울 랜덤클럽, 시끌벅적 새 막을 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효준이 이야기 사실 준이가 주말에 서둘러 다녀간 건.. 숙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동생 효준이가 수능을 보고 진학 문제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내 보기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이제는 제 스스로 알아서 할 것 같으니 전화 통화만 하라고 했는데도... 형 마음에 걱정이 되었던 게지요. 기어코 주말에 숙제를 핑계 삼아 다녀갔습니다. 효준이가 도서관에 다녀간 건 그새 열흘쯤 지난 것 같습니다. 꼭 만나야 한다며 미리 시간약속까지 하는 걸 보고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학 갈 마음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꺼냈지요. 효준이가 체육 전공으로 대학을 가겠다며 운동을 시작한 건 꽤 되었는데.. 수능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입시준비가 시작되니 체육관 수강료가 어마어마하게 나온 거였어요. 수강료만이 아니라 대학 등록금이 더 걱정이라면서 전문대를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애썼는데 어렵더라도 하고 싶으면 한 번 해보자, 말은 그리 했지만 아이는 벌써 오랫동안 고민하고 마음을 먹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 꼭 나이 스무살에 대학을 가야 하는 건 아니다. 대학을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늘 하던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습니다. 운동을 몸으로 하는 게 아니라 돈으로 하는 세상이구나 싶어 안타깝고 답답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닥 걱정이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이의 담담한 말투, 편안하게 눈을 맞추는 표정에서... 이제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용기를 낼 힘이 느껴졌거든요. 더운 여름, 아침에 온몸이 욱신거리고 무거울 때면 ‘왜 이렇게 힘든 운동을 하려고 했나’ 눈물이 날 때도 있다고 했었는데.... 녀석, 오랜 시간 공들인 게 아깝고 아쉽고 억울하기도 하겠지요. 그런데도 오히려... 저희들 보고 걱정 말라고 합니다. 어차피 자격증은 따로 시험 봐야 하니까 언제든 필요하면 따겠다면서요.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어요. 진짜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요... ^^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에 해마다 그렇듯, 훌쩍 자란 아이들 얼굴이 가득 떠오릅니다. 여전히 마음을 앓고 시간을 앓으면서도 몸이 자라는 아이들... 올겨울에도 아이들이랑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하루 여행을 다녀오면 좋을 텐데요... 그러고 보니, 아이들한테 언제 비행기 한 번 태워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도 벌써 서너 해쯤 지나고 말았네요. 서귀포에 기적의도서관 만드는 일을 맡아 열두 번쯤 제주도를 오가던 때였습니다. 늦은 밤, 새벽, 때를 가리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 내리면서 하늘에서 내려다 뵈는 세상을 아이들에게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왜 뜬금없이 오늘 같은 날 자꾸 그 약속이 떠오르는지... ㅎㅎ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하늘을 날 것 같은 날에 말입니다. ------------------------------------------------------------- 실은... 며칠 전에 끄적여두었던 메모를 다시 꺼내어 올렸습니다.ㅎㅎ 느티나무 하루하루를 꽉 채워주는 우리 자원활동가들 모두에게 꼭 전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거든요. 아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지는 걸까 참 궁금했는데...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를 부쩍 많이 한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지요. 이름을 기억하고 그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제야 알았습니다. 당신들의 수고가, 아니 그저 도서관에 찾아와 머무르며 스치는 모습이 저희들이 살아갈 세상의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걸, 당신들이 미처 이름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까지... 언제든 마음 한자락 기대고 함께 배우며 어울려 살아갈 친구로 여겨진다는 걸 말입니다. 햇볕 잘 드는 새 도서관으로 옮겨오면서 이다음에 도서관에서 결혼식 할 거라고 벼르는 녀석들...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이 정말 신랑신부가 되어 도서관에 꽃장식을 하고, 저희를 꼭 닮은 아이들을 안고 와서 책을 읽어줄 때쯤이면...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 본 풍경보다 두 배쯤 더 이 세상이 근사해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