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랫동안 도서관의 자원활동가로 일해 왔고, 지금은 도서관 이용자로 있는 강기숙입니다.
몹시도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도서관이 모토로 내세운 ‘공공성’이라는 말에 매료되어 도서관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나처럼 이기적인 인간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내가 사는 동네 안에, 그것도 좋아하는 책이 있는 곳에서 열려 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맨 처음 공부방멘토로 시작하여, 몇몇 독서회도 하고 도서관청소, 책싸기, 책정리, 책읽어주기, 이야기극장, 청소년동아리 지원, 대출반납, 북카페 등의 일상서비스 지원에서부터 각종 프로젝트 사업에 이르기까지 장르구별 없이 그때그때 도서관이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활동해왔습니다.
뭐 많은 일을 한 것 같지만 오랜 기간 나누어 해 온 일이라 부담이 되는 일은 아니었지요.
대출반납에 왜 이리 원칙이 없을까? 대출반납증을 가져 오면 책을 빌려주는 것이 원칙인데, 왜 일관성 있게 원칙을 지키지 않을까? 까뮈전집은 계단참 서고 보다 일층 세계문학 서고에 꽂혀야 더 좋지 않을까?
자원활동이었지만 내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도서관 곳곳을 살피기도 하고, 도서관에 대한 공부도 하며 주인의식을 갖고 늘 임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자와 실무직원 사이에서 서로의 요구와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 틈을 채울 수 있는 자원활동가라는 존재가 제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늘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공간에서 당연한 일이겠지요. 내 생각과 도서관의 생각이 다를 때도 많았고, 원칙을 느슨하게 적용하는 도서관의 문화에 갈등을 느끼기도 했지만, 공공성과 다양성이 묘하게 공존하는 도서관의 매력이라 여기면 또 그런 다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었으니까요.
자원활동을 그만 둔 후에도 느티나무가 갖는 이러한 상징성을 즐기기 위해 때때로 도서관을 이용해 왔습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3월 6일 대출반납시간변경 공지문이 뜨면서 발생한 많은 의문들과 소통의 부재가 현재까지 이어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소통의 장소를 찾아 몇 줄 안 되는 눈도장에서 위태로운 소통을 하고 있을까요?
눈도장 너무 외롭습니다. 합리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너무 협소합니다. 보는 사람들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도서관은 소통의 광장입니다. 그렇게 좁은 곳 말고 얼마든지 넓은 곳에서, 도서관 곳곳에서 자유로운 소통이 일어나길 바라며 몇 가지 질문과 당부의 말씀 이곳에서 또 드립니다.
내일부터 도서관 대출반납시간이 변경되는군요.
대출반납시간 축소에 대한 여러 이용자들의 문의가 있었는데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은 끝내 들을 수 없었네요.
대출반납이 제한되는 시간에 활동을 자원한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가들에게는 카운터를 맡기기 않기로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활동가들에는 통보를 했을 뿐이었지요?
카운터를 사서에게 맡기기로 한 결정,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간 대출반납서비스를 자원활동가들에게 맡겨 왔던 이상, 그 변화의 취지는 미리 밝혔어야 했습니다.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알리겠습니다.
이용자들의 이야기와 요구에 늘 귀를 기울이면서도,
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정중하게 그 이유를 밝히고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느티나무도서관 헌장 중, 아홉 번 째
자원활동가 상시모집 중단에 대한 공지문을 올렸다가 내리셨고, 이를 본 활동가들이 공지문이 작성된 경위와 그 정확한 결정 사항을 묻는 질의서를 낸 지 20여일이 지났어도 그에 대한 공식적인 대답, 없습니다.
‘향후 모든 자원활동은 동아리활동으로 전환될 예정’이라는 문구도 모집공고에 올려졌다 사라졌습니다. 동아리운영 방식에 대한 문의도 많았고, 이해 가능한 설명 마찬가지로 없었습니다. 자,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대답이 없으므로, 제가 먼저 이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자원봉사’는 자발성, 이타성, 무보수성이 그 핵심 특징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자원봉사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봉사’라는 말에는 이미 ‘이타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자발성’을 더 강조한 표현이 느티나무도서관에서 말하는 ‘자원활동’입니다.
자원봉사, 자원활동, 도우미(느티나무도서관 자원활동가(회)의 전 명칭) 모두 이름은 다르지만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말씀하신 ‘동아리활동’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자발적으로 모여서 무보수로 하는 활동이지만 이를 자원봉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동아리활동’은 전적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활동으로 타인을 위한 봉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원활동을 통해서도 활동가 자신이 봉사의 기쁨을 누리고, 자신의 역량을 키울 수 있지만, 자원활동은 그 행위의 대상이 일차적으로 자신을 향해 있지 않고 타인을 향해 있기에 본질적으로 동아리활동과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용자들의 권한을 지키도록 그 의무를 위임받은 도서관의 ‘이사’님들 역시, 자발적으로, 무보수로, 이용자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자원활동가입니다. 이분들을 동아리활동가로 전환하고 동아리활동 방식으로 운영하시겠습니까?
책임과 권한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자원활동과 동아리활동을 통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원활동가를 뽑고 운영하시려거든 기능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그들의 자주적인 역량을 인정하고, 이 역량을 키우고 북돋는 데 더욱 힘을 써 주십시오.
자원활동가회를 구성하도록 돕고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마땅히 그리하여 주십시오.
납득할 만한 이유도 모른 채 어느 날 잘려 나간 활동가들은 (대출반납,책싸기)기계가 아니었으므로, 동료들과 함께 했던 일터(보수를 받지 않는다 해서 일터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요, 삶터 한 켠을 잃고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이 일방성에 대항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무언가를 안하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자원활동을 그만두고, 후원을 끊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깝게도 도서관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이사장님 활동가/이용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겠다 하니, 왜 이렇게까지 되어서야 하는......안타까움 말할 수 없지만, 환영합니다.
그 과정 또한 처음의 일방적인 통지방식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라 원.투.쓰리 연타를 맞은 것처럼 당황스럽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4월 4일 간담회가 열립니다.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간담회에서 합의되고 결정된 사항들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설명회로 인해 발걸음을 돌린 사람들이 다시 도서관으로 향할 수 있도록, 더욱 애써주시기 바랍니다.
설명회에서 들었던 책싸기팀의 활동중단(역시 통보로 알림) 이유는 ‘책을 싸야할 시점이 있었고, 이젠 책싸기가 필요 없는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책들도 듣고 놀랄 말이지요?
시대적 요구라는 거창하기만 할뿐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이유를 대는 방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상식적인 언어로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한낱 이용자에 불과한 제가 도서관이 하려는 일에 왜 이리 질문을 던질까요?
그것은 도서관의 주인은 바로 이용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의 수만 권의 책과 자료도, 도서관의 직원들도, 자원활동가와 후원자도 모두 이용자를 위해 존재하니까요.
제가 바로 도서관의 주인이니까요.
느티나무도서관은 공공도서관이고, 이용자 중심의 도서관임을 누누이 천명해 왔으니까요.
느티나무도서관이 더 이상 이용자중심의 도서관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도 더는 질문하지 않겠습니다.
‘자발성, 다양성, 일상성이 다 갖추어져야 ‘공공성’이 구현될 수 있습니다.
공공성은 함께한다는 의미로 일방적으로 기획되어 나눠지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같이 소통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진짜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2011. 예비사서학교 2강 중에서
진짜 공공성과 가짜 공공성이 따로 있을까요?
내가 하려는 것만이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공성은 하나입니다.
문제는 이 ‘공공성’을 지키려는 부단한 노력에 있을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느티나무도서관이 공공도서관으로서의 위상을 잘 지켜나가길 바라고 또 바라면서 이 글을 맺습니다.
이용자 강기숙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