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5일, 도서관 한복판에서 2025년 첫 번째 마을포럼을 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저널리즘은 어떤 모습일지, 이웃들과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포럼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레퍼런스 패널로 정준희 언론학자와 김만권 정치철학자가 함께했습니다.
마을포럼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합니다.
도서관 신문스크랩 자원활동가였던 조이언 님의 『언론자유의 역설과 저널리즘의 딜레마』 (정준희 외) 낭독으로 행사를 열었습니다.
언론(XX)의 기승전결_우리는 이 서사의 관객에 불과할까?
정준희(언론학자)
● 서사
언론은 여러분에게 각종 ‘이야기’를 전달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그저 듣는 사람에 불과할까?’ 이 질문을 시작으로, 서사라는 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서사’(narrative)는 사건이 어떻게 벌어지고 끝나는지를 전달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이야기의 재미는 사건 자체의 흥미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즉 서사의 구조가 이야기의 재미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서사 구조는 ‘기승전결’이다. 등장인물 간에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이 점점 커지면서 사건이 전개되다가 결국 해결되며 결말로 이어지는 구조가 이야기의 대다수이다. 우리는 정치나 역사를 바라볼 때도 이러한 익숙한 서사 구조를 많이 보곤 한다.
언론의 역사는 어떤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을까? 특히나 지금이 언론의 위기 상황이기 때문에, 이 위기가 어떤 결말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해볼 수 있을 것이고, 또 언론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기사로서의 이야기에는 어떤 기승전결의 구조가 있을지도 살펴보려 한다.
● 언론역사의 서사
언론 서사에 관한 연구는 다양하지만, 모든 연구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가장 일반적인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언론이 권력의 탄압 속에서 자유를 쟁취해 온 과정으로 그려진다. 한편, 대중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재미’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어떤 매체가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고, 대표적인 매체가 바로 신문, 라디오, TV 등이다.
기술주의적 서사도 존재한다. 신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인쇄술 덕분이고, 여전히 인쇄술이 중요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정보를 접하는 방식이 변하면서 그 역할이 줄어들었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접하는 경우가 많고, 정보통신 기술이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바뀌면 저널리즘의 형태도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까지 언급한 서사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특징을 가진다. 무엇인가가 계속 발전하다가, 어떤 지점에서 탁 걸리는, 선형적 구조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언론의 역사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
● 언론기사의 서사
#모든 현실이 언론 기사가 되지는 않는다
언론 기사는 대중들에게 ‘이야기’로 전달이 된다. 저널리스트들은 항상 철저한 사실만을 전달한다고 하지만, 단순히 사실만 모아놓는다고 해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는 어렵다. 기사를 흥미롭게 하기 위해 쓰는 장치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뉴스 밸류(News value)다.
보통 신문이나 뉴스 기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제목들이고 아마 대부분 사건사고와 관련된 것들일 것이다. 특히 자연재해나 대형 사건이 언론 보도의 가장 위를 장식한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갈등이고, 또 누군가가 범죄를 저지른 내용 등이 뉴스로 가장 많이 보도되곤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언론이 만들어낸 사실은 약간의 허구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이는 언론이 정보를 필터링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언론 기관은 뉴스 밸류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될만한 것들만을 선별하여 전달한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 결국 무엇이 뉴스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 우리의 시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즉 언론은 세상을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보여주고,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언론이 보여주는 세상은 사진이나 정확한 묘사화가 아니라 점묘화처럼 작은 점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미지에 가깝다.
#언론신화 #민주주의와 언론의 모호한 관계
지금까지 언론은 이러한 방식으로 권력을 누려왔었고, 여기에서 몇 가지 신화가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민주주의와 관련된 신화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이 유명한 말은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한 말로, 언론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구 중 하나다. 또한 언론을 제4의 권력으로 보기도 한다. 입법, 행정, 사법에 이어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으며, 부정부패를 폭로함으로써 권력을 훨씬 더 민주적으로 만든다는 주장이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그리고 자유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언론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전 세계 가운데 어떤 언론도 이러한 모습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언론은 때로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언론 자유’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특정 언론이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할 때 제재하려고 하면 ‘이 정부는 언론 자유를 탄압한다’고 반발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언론이 잘해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나라는 거의 없다. 오히려 시민들이 피 흘려 민주주의가 쟁취된 다음에 언론이 그 성과를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우리의 사회적 소통과 언로(言路)
현재 우리는 언론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고 있다. 민주적 현장에서 기성 언론을 통해 얻는 정보보다 유튜브 등의 플랫폼을 통해 얻는 정보가 더 많아지고 있다. 이는 기성 언론이 일부러 정보를 안 보여주려고 했다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대응이 느리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 즉 과거와 달리 이제는 기성 언론을 거치지 않고도 직접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기술적 변화에서 생기는 일이다.
현재 언론은 여러 측면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수익 창출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에 따라 더 많은 기사를 생산하고, 자극적인 제목을 사용해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래야 광고 수익이 줄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언론의 핵심 문제는 공정성, 객관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생존을 위한 경쟁 속에서 저널리즘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짜뉴스 #허위조작정보
‘가짜 뉴스’는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허위 조작 정보’다. 허위 조작 정보는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거짓을 섞어 전달하는 정보로, 예를 들어 SNS 등을 통해 퍼지는 수많은 가짜 정보는 사람들이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현상을 ‘정보 혼란의 시기’라고 표현한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의 상실
이와 같은 현상의 직접적인 결과물은 바로 ‘신뢰가 사라지는 것’이다. 과거와 비교하면 오늘날 사회에서 신뢰는 훨씬 얇아졌다. 돈과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믿고 관계를 유지해야 할 대상들에 대한 신뢰가 엄청나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보에 대한 신뢰 역시 떨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얻지만, 그 정보가 어떤 신뢰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대단히 불투명해졌다.
●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는 민주주의 이론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와 언론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릴 때가 되었다. 더 이상 민주주의는 언론이 자연스럽게 작동한다고 해서 보장되지 않으며, 시민들이 제대로 만들어낸 언론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복원될 수 있다. 과거 제퍼슨이 말한 것처럼 ‘정보를 많이 가지면 우리는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고, 훌륭한 민주주의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개념은 이제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도, 가짜 정보를 접하고 자신이 많이 안다고 착각하는,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시민들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리터러시가 필요한데,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표현을 좀 더 사려있게 할 줄 아는가, 내가 어디에 노출되어야 하며 언제 노출되지 않아야 하는가, 그리고 노출된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런 부분들에 대해 새로운 시민적 태도들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오늘 이렇게 여기 모인 분들과 이 공간이 소중한 이유는 시민들이 스스로 연대하고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을 큐레이션하고, 읽을 것과 읽지 않을 것들을 가려내며, 읽은 것들에 대해 퍼트리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실천이 될 수 있다. 이는 정부나 특정 언론사가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자발적인 시민적 연대가 좋은 저널리즘 콘텐츠, 저널리즘 행위, 좋은 책들과 연결돼서 미디어 환경을 훨씬 더 능동적인 형태로 바꿀 때, 지금과 같은 상황은 그나마라도 바뀔 가능성이 보인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김만권(정치철학자)
Q. 철학 쪽에서는 서사의 힘을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잊고 몰두하게 만드는 힘’ 이라고 본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을 살펴보면, 우리가 정말로 그런 서사의 내용에 몰두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철학자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서사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사실 지금 서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서사가 단순한 정보와 데이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읽으며, 결국 지금 서사를 죽이는 주범이 언론이라는 것과 더 나아가 시민들도 이에 가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한병철은 덧붙여 이렇게 이야기 한다. 지금 언론 서사의 목적은 ‘더 많이 게시하고, 더 많이 공유하고, 더 많이 링크를 거는 것’이라고. 이런 성향이 언론 서사를 어떻게 왜곡하게 되는가.
정준희(언론학자)
A. 원래 언론인들은 자신들이 서사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를 낸다. 대표적인 말로 ‘소설 쓰고 앉았네’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화를 낼 것이다. 언론인들은 자신들이 팩트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절대 허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소설처럼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요소를 추가해야 하는데, 그로 인해 사람의 감정이 흔들리기 때문에 핵심적으로 할아야 할 건조한 사실들은 외면받게 된다는 것이 전통적인 저널리스트들의 입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과학자들의 입장과도 유사하다.
그래서 현대 과학과 현대 저널리즘은 매우 비슷한 배경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중세 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성경적 서사에만 몰입하고, 왕만 바라보는 중세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었다. 이 때문에 그것을 명백히 반박해주는 지동설이나 과학정 성과들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시대 속에서 저널리즘과 과학이 계몽의 주체로 등장을 했었고, 여기까지는 굉장히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저널리즘이 ‘팔려야’된다는 점이다.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들어야 하므로, 결국 스스로 서사를 만들게 된다. 특정 대상을 적으로 만들고,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 대상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극단적 서사를 만들어 낸다. 또 여러 곳에 게시되고, 공유되어야만 영향력을 키울 수 있기에 점점 더 자극적인 방식을 택하게 되며 결국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결과를 낳는다. 단단한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무관한 이야기를 퍼트린다. 시민들이 기사를 얼마나 충분히 공감하며 무엇을 읽어내는가에 관심이 없으며, 단지 많은 사람들이 클릭하고 읽기만을 바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결국 서사의 힘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될까? 대안서사를 만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이야기 없는 단순한 사실들의 집합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대안 서사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시점이다.
질문게시판과 온라인을 통해 받은 사전질문, 현장에서의 열띤 질문과 답변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 사전질문 1
Q. 미디어를 접하며 나도 모르게 확증편향을 갖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나와 반대 성향의 언론 기사를 일부러라도 챙겨 읽는 게 좋을까?
A. 반대 성향의 언론을 일부러 챙겨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은 자신의 가치관을 굳건히 지키며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시기일 수 있다. 다만,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지역화폐 정책의 방식처럼 논쟁이 필요한 문제라면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고, 또 그 견해들을 내 안에서 충돌시켜보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사람들은 보통 불안을 느낄 때 확신을 키우려 한다. 이는 확증편향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마음의 씨앗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만큼 그렇게 불안하지 않고, 우리가 정말로 불안해할 문제는 몇 가지로 한정된다. 따라서 확신할 수 있는 영역은 신중하게 정하되, 나머지는 확실하지 않는 상태로 두는 게 훨씬 좋을 수도 있다.
올바른 가치를 지키기 위한 민주적 실천을 이어가고,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여러 합리적인 토론들을 챙겨보며 내가 설득되는 경험을 해본다면, 모든 걸 확신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 사전질문 2
Q. 우리 사회 속 혐오를 확산시키는 비윤리적인 사이트를 어떻게 규제할 수 있을까?
A. 표현의 자유는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혐오와 비윤리적인 행위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법이 모든 것을 규제할 수는 없으므로, ‘자율 규제’를 통해 윤리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유튜브 ‘플랫폼법’과 같은 제도를 도입해 플랫폼이 스스로 콘텐츠를 관리하고 자율 규제 시스템을 마련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이를테면 아동 콘텐츠, 시사물 등에 대한 규제 기준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이에 대한 관리 비용 등을 부담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법은 자율 규제에서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걸러지지 않은 것들을 최종적으로 규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는 사실은 아주 정교한 과정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윤리성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 참여가 굉장히 중요하다. 부도덕한 소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듯이, 그 소수는 합리적 다수에 의해서 제거되지 않으면 절대로 폭력성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시민들은 윤리적 기준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자발적으로 그 기준을 지키는 일종의 경찰 역할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건전한 사회적 규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
# 사전질문 3
Q. 언론의 공정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A. 한국어의 ‘공정성’ 개념은 영어권의 ‘fairness’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어로 ‘공정’은 공의롭고 정의로운 것을 의미하지만, 언론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정의로울 순 없다.
영어로 ‘fair’라는 말은 ‘균형 감각이 있다’는 뜻에 훨씬 가깝고, 반드시 5대 5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는 6대 4가 공정할 수도 있는, 즉 반드시 중간에서 딱 끊어지는 게 아닌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어떤 중간선을 찾는 게 fair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어떤 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때 기자가 6시간을 취재했다고 해서 사건의 전말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 않나. ‘fair한 보도’란,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언제 어디서 불이 났고, 원인은 아직 모른다’ 정도로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관점에서 보면 이 기자는 왜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는지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알아낼 수 있던 것에서 최대한을 사실에 근거하여 얘기하는 것이 ‘fair’한 것이다. 양쪽 의견을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반영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유연한 개념으로서의 공정함을 우리는 과연 갖추고 있는가 보았을 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경우도 매우 많을 것이다.
팩트풀니스(Factfulness) 개념에 따르면, 단순히 많은 팩트를 수집한다고 해서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첫째, 최대한의 사실을 수집하려 했는가, 둘째, 이 정보가 완전하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하는가이다. 특히 두 번째 요소는 ‘편향을 밝히는 것’, (그렇다고 해서 편향을 대놓고 밝히자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즉 투명성’ 개념과 관련된다. 편향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관점을 바탕으로 사실을 수집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 관점에서 내가 수집한 정보는 이렇다. 하지만 다른 견해에서는 다른 사실이 보일 수도 있으니, 논쟁을 통해 검토해보자’라고 얘기하는 것이 투명한 태도다.'
따라서 기존의 공정성과 중립성 개념을 ‘사실충실성’과 ‘투명성’으로 대체한다면, 보다 현실적이고 유용한 기준이 될 것이다.
# 현장질문 1
Q. 유튜브는 언제까지 갈까? 요즘 ‘나도 한 번 유튜브나 해볼까?’라는 얘기도 많이 하는데, 이처럼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요새 같은 시기에 대통령마저 유튜버에게 휘둘리는, 어떤 선동과 자극이 배출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그 잘못은 결국 사이트를 만든 기술자들에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근본적인 고민도 든다. 또 아이들에게는 어떤 미래를 제시해야 할지, 다양한 의문이 가득해 있는 시점에서 과연 유튜브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 궁금하다.
A. 미디어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영원한 미디어는 없다. 한때 왕좌를 차지했던 미디어도 결국 새로운 것에 밀려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다른 형태로 남아 존재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디어는 서로 뭉쳐지고,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한다. 현재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이 대표적인 예다. 누구나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고, 누구나 그 콘텐츠를 찾아와 볼 수 있는 형태 자체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언젠가는 갑자기 새로운 게 만들어지고, 기존의 것을 밀어낼 것이다. 이런 흐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에 지금의 미디어가 제공하는 유익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 낫다고도 생각한다.
미디어의 구조 중 이용자를 특정 플랫폼 안에 가두려는 형태는 바람직하지 않다. 저널리즘 콘텐츠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나 시청자를 한곳에 묶어두기보다 사회로 돌려보내 주고, 연결해주는 것이 훌륭한 콘텐츠다. 저는 그래서 채널 구독자들에게 책도 좀 읽고, 여행도 다녀보라고 자주 권유한다.
# 현장질문 2
Q. ‘베스트셀러에’ 대해 의문이 많다. 독자들이 자신의 취향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슨 책을 골라야 할지 잘 모르다 보니 가장 쉬운 지표가 되는 베스트셀러를 사게 되는데, 정말 그 책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취향과 가치관에 맞을 수 있을지 항상 의문이 든다.
유튜브의 경우에도 그렇다. 나도 모르게 조회수가 높은 영상과 음악을 고르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나 스타일을 선택할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공급자의 영향도 물론 있겠지만 소비자 스스로도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관심사를 잃어버린 것 같다. 어쩌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일까? 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인 것일까?
A. 미디어와 콘텐츠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Popular Taste, 즉 ‘대중적 취향’이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책을 쓰는 작가, 대형 서점의 점주라면 누구나 이 대중적 취향을 알고 싶어한다. 무조건 큰 성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적 취향은 실제로 그렇게 쉽게 예측되고 계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의를 무엇인가>라는 책이 인기를 끌었다고 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내놓는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묻어가기 효과’나 ‘잔상 효과’가 있어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둘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끌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경향은 ‘문화적 경험’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나 책은 직접 보기 전에는 재미있는지 알 수 없다. 반드시 내가 내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만 그 결과를 얻는다. 반면, 일반 상품은 다르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의 맛은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선택할 때 큰 고민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나 책은 대부분 한 번 보고 끝나기 때문에, 새로운 걸 선택하는 것이 무섭고 두렵고 불안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검증된, 안전한 투자를 하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심리를 기반으로 장르영화, 베스트셀러, 천만 영화 같은 기존에 성공한 포맷이 계속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콘텐츠가 반드시 뛰어나지 않더라도, 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문화상품의 공식이며, 우리도 이 공식 속에 어쩔 수 없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공식에서 벗어나기란 대단히 어렵고, 만약 유튜브에서 책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을 본다면 내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은 불가피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도 본다.
#알고리즘 #우연한 만남 #세렌디피티
그러나 문화상품을 소비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건 알고리즘을 맹신하지 않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마치 여러분들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특정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노출시켜 계속 그 안에 머물게 만드는 방식이다. 결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우연한 만남’(Serendipity)이 아주 중요하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자신의 취향을 명확히 알고 있더라도, 세렌디피티적인 만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의 취향에 있어 빈 부분들, 또는 내가 좋아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아마 평생 못 만나고 지나가지 않을까. 이런 세렌디피티를 만들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인간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포럼장 한복판에는 사서들이 언론관과 저널리즘을 주제로 엮은 <저널리즘 새로고침> 컬렉션을 전시했습니다.
단무지 주먹밥, 롤케잌, 과일... 십시일반 모아주신 간식은 다같이 맛있게 나눠먹었습니다.
올해 두 번째 마을포럼은 5월에 열립니다. 새로 열릴 포럼에서도 다시 만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