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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하철서재] 기분 좋은 날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18-03-21 조회수 : 8,637

 

[경기도지하철서재] 기분 좋은 날

경기도지하철서재(이하 '서재')에서 기분 좋은 날은 책 읽는 방문자가 많은 날이다. 내가 서재에 있는 시간에 국한된 관찰이지만, 서재에 걸음하는 사람의 절반은 책에 눈길을 주지 않고 전화기를 보거나 다른 용무를 보다간 떠난다. 책을 펼치는 사람은 무조건 반갑다. 내가 읽은 ‘강추’ 책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지난해 5월 26일 오후 6시경 동천역에서 있은 일이다. 고2-3쯤으로 보이는 청소년 두 명이 나란히 서가에서 책에 열중해 있었다. 심상치 않은 광경이었다. 각자 앞에 그림책이 펼쳐져 있다. 고개를 수그리고 곁눈질도 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읽고 있다.
“야, 죽이게 잘했다.”
한 쪽이 책장을 덮더니 몸을 빙글 돌려 뒤쪽 서가에 둔다. 그림책 <빨간 나무>였다.
나는 속으로 ‘그치, 그치!’ 반가운 탄성을 지른다.
저렇게 ‘늙은’ 남학생의 주의를 끌어 끝까지 놔주지 않고 순수한 찬사를 얻어낸 그 책이 예뻤다.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그 학생도 다시 보였고 예뻤다. 책장을 열기 전에 무슨 기대를 했을까. 기억에 남아 있는 그림책이 있었을까. 우연히 펼친 책에서 뭔가를 기대했을 것 같지 않다는 건 내 선입관이었을까.
옆에 섰던 학생은 친구가 자리를 뜬 뒤에도 별 움직임 없이 보던 책을 마지막까지 보았다. 그 학생을 붙든 책은 <특별한 손님>.
벌써 여러 날 그 서가에 표지가 보이게 진열한 책들이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시끄러운 무리에 섞여 두 학생이 대합실을 떠나도록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빨간 나무>는 화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호주 작가 손 탠의 작품이다. 내가 그의 작품을 가까이한 지는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초현대 도시문명을 배경으로 상상적인 모티프를 즐겨 담아서, 소박한 자연 표현과 단순한 구성을 좋아하는 내게는 낯설었다. 내가 숀 탠의 세계에 마음을 열게 된 첫 작품이 <빨간 나무>였다. 온통 절망뿐인 세상을 홀로 안간힘 쓰며 걷는 듯한 주인공의 자그만 몸이 마음에 남았다.
<특별한 손님>에서는 부모가 이혼하고 아버지와 사는 여자아이가 아버지의 여자친구인 아줌마와 아들과 함께 지내게 된 뒤 불편해하는 시간이 그려진다.     
학생들이 서가를 떠날 무렵, 기둥의자에 앉은 중년 여성은 <시장은 정의로운가>를, 벤치에 앉은 또 다른 여성은 <배려>를 읽었다. 어느 쪽에 말을 걸어도 다른 한 사람까지 집중을 방해할 듯하여 말을 걸지 못했다.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날이었다.

특별히 마음이 가는 책들이 있다. <유배중인 나의 왕>은 엉뚱한 짓을 저지르던 아버지를 탓하다 뒤늦게 원인이 알츠하이머인 걸 알게 된 아들의 자전적 글이고, 역시 치매를 앓는 구순 노모를 간병하며 역사학자 김기협이 기록해 책으로 묶은 것이 <아흔 개의 봄>이다. 둘은 치매 컬렉션에서 좋게 읽은 책이었다. 이 책들이 있던 자리에서 보이지 않게 된 날은 기뻤다. 분명 그 누군가도 나처럼 감동하겠지.
널리 알려진 책, 누가 봐도 재미있어 보이게 포장된 책이라면 내가 서가에 꽂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채가는 손이 나타나도 놀랍지 않다. 내 생각에 참 좋은 책인데 수더분하고 투박해서 눈길을 못 끌 것 같으면 마음이 쓰이고 그 책의 임자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기다려진다. 사흘에 한 권 꼴로 읽어도 평생 세상에 있는 책의 0.2퍼센트밖에 읽지 못한다니,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굉장한 일인지 모른다.  

(2018.2.27)

* 이 글은 지하철서재를 매주 순회 방문하며 일하는 글쓴이가 서재에서 보고, 듣고, 만나고, 생각한 것을 적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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