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느티나무에서는

[경기도지하철서재] 단골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18-04-01 조회수 : 8,449

[경기도지하철서재] 단골

오 선생님은 동천역 서재의 단골이다. 역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단지에 사시는데 퇴근길에 서재에 들르는 걸 낙으로 삼으셨다.  

처음 인사를 나눈 건 지난해 9월 첫주. 며칠 전 키오스크 대출반납을 개시해서 그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설비를 해준 직원과 점검하러 서재에 나간 날이었다. 컴퓨터로 하는 방법을 모르는데 알려줄 수 있느냐고 말을 거셨다. 실은 나도 겁을 내 잘 쓰지 않던 참이라 곁에 있는 기술자 도움을 받으며 알려드리는데, 흥미로워하며 배우셨다. 그날 빌려가신 책을 보며, 탐구심이 왕성한 분이구나 했었다. 

한 달 뒤 더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10월 24일 세 번째 낭독회 날이었다. 추석 쇠고 낭독회를 시작은 하였는데 그때까지 참가자가 없었다. 그날도 막막해하며 6시 반쯤 역에 나갔는데 벌써 와 기다리고 계신 게 아닌가. 책을 소리내어 읽는 모임은 처음이셨지만, 내용에 곧 열중해서 우렁우렁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로 유창하게 읽으셨다. <사피엔스>는 젊은 이스라엘 역사가 유발 하라리의 패기 있는 질문과 가설이 책장마다 펼쳐져 같이 읽은 세 사람 모두 재미있게 읽어나갔다.    

“참 재미있어요. 젊은 친구들이 책을 읽으면 좋은데 여기[동천역 지하철서재]도 보면 나이 든 사람이 보고 젊은 친구들은 전화기만 들고 있잖아요.”  

“예, 전화기로도 좋은 걸 많이 보지만 이렇게 길게 읽는 책은 또 다른 거 같지요.”  

“이런 좋은 책을 같이 읽는 사람이 더 있으면 좋겠어요.” 

그 다음 낭독회 때는 오 선생님의 안타까움을 풀어줄 젊은 친구가 나타났다. 얼굴이 익기에 말을 붙였더니 쑥스러워하며 참가한 젊은이는 휴학중인 대학생이었다. 육십대, 오십대, 삼십대, 이십대가 함께 책을 읽기는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오 선생님이 가져오신 바나나도 나누어 먹었다.

오 선생님은 낭독회가 없는 날에도 퇴근 시간 무렵 간혹 서재에서 마주치면 말벗이 되어주셨다. 우리는 정치 얘기도 하고 자식한테 잔소리 들은 푸념도 주고받았다. 오 선생님은 서재를 아끼셔서 서재 한 구석이 달라져도 금세 알아차리셨고, 대활자본 설문조사를 내갔을 땐 곧바로 답변지를 써주셨다.   

12월에 동천역은 무척 추웠다. 영하 십몇 도까지 내려가는 날이 이어졌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감기를 심하게 앓았고 오 선생님은 다치시기까지 했다. 해를 넘기며 낭독회를 쉬게 되었다고 전화를 드리니 재개할 때 꼭 연락하라셨다.
 

정자역 지하철서재에도 단골 어르신이 있다. 11월 21일에 처음 얼굴을 익히게 된 분이다. 책을 펼쳐 십여 분이나 열중해 읽으셔서 눈여겨 보게 되었는데, 내가 일하던 앞쪽 서가로 오더니 공황에 관한 책이 있지 않느냐 물으셨다. <굿바이 공황장애>를 얼른 들어 건네 드리니 아 거기 있구나 하셨다.  

11월만 해도 두세 번 뵈었고, 12월 1일 채사장 작가사인회 날도 행사 시작 전 짧게 들렀다 가셨다. 오후에 뵌 날도 있으나 대개 오전 11시경 규칙적으로 오시는 듯했다. 가까이 사시든지, 자주 지나다니시는 길이든지 할 테다. 앞으로도 계속 뵐 분이란 생각을 하였는데, 그 뒤로 단 한 번도 말을 붙여보지는 못했다. 

12월과 1월에도 여러 차례 마주쳤다. 서재에 나갔다가 계신 걸 보면 반가운 마음이 불쑥 솟구친다. 한데 어르신도 나를 기억하시련만 아는 내색을 하시지 않는다. 늘 말없이 서가를 꼼꼼히 살피거나 독서에 열중해 계시니 방해 될까 말을 걸지 않았다. 고개 숙이고 책을 읽고 계시면 일하는 틈틈이 곁눈질을 하는데 잠시 내 일에 열중하다 돌아보면 사라지고 안 계셨다. 그날 수거해간 용지를 기록하며 이 중에 어르신이 적으신 것도 있을 테지, 혼자 상상한 날도 있다.  

어르신이 서 계시던 서가, 손에 들고 계시던 책들을 기억한다. 자주 오는 분답게 서재 곳곳을 빠짐 없이 둘러보셨고, 큰글씨책의 수필류부터 독립출판물까지 두루 손에 드셨고, 5분이든 10분이든 꼭 읽으셨다. 분명 동천역의 오 선생님처럼 정자역 서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실 것이다.  

요새 나는 그전만큼 정자역 서재에 들르지 못한다. 어르신은 오늘도 걸음하셨겠지. 오래오래 ‘즐독’하세요.


(2018.3.5)



 

 

* 이 글은 지하철서재를 매주 순회 방문하며 일하는 글쓴이가 서재에서 보고, 듣고, 만나고, 생각한 것을 적은 것입니다. 

 

 

 

 

이름 :
패스워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