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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팬데믹 시대, 아픔과 살아간다는 것> 포럼에서 주고받은 이야기 01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21-01-22 조회수 : 11,932

 [후기] <팬데믹 시대, 아픔과 살아간다는 것> 포럼에서 주고받은 이야기 01  

 

“여전히 이 팬데믹 시대의 한복판에 있는데 지난 행적을 되짚어보며 

내가 그때 이 팬데믹 시절의 어느 시점, 어느 곳에 있었나, 

전염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던가 아니었던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보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짧은 기간 동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빨리 변했다. 2020년 달력을 들여다본다. 

날짜들마다 다양한 약속들이 적혀 있다(나는 모든 걸 강박적으로 적어놓는다). 

여전히 이 팬데믹 시대의 한복판에 있는데 지난 행적을 되짚어보며 

내가 그때 이 팬데믹 시절의 어느 시점, 어느 곳에 있었나, 

전염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던가 아니었던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보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짧은 기간 동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빨리 변했다. 2020년 달력을 들여다본다.”

 

- 『별빛이 떠난 거리』 빌 헤이스(알마) 중에서 

 

 

 

지난 1월 13일 수요일, 빌 헤이스의  『별빛이 떠난 거리』 (알마) 한 구절을 낭독하며  <팬데믹 시대, 아픔과 살아간다는 것> 포럼을 열었습니다.

 



패널과 스태프는 도서관에서, 이웃들은 ZOOM에서 함께한 포럼,  
이웃들의 반가운 얼굴을 커다란 화면으로 마주한 채 시작했습니다. 

 

 
 

마을 포럼 레퍼런스 패널은 인류학자이자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백영경 님(왼쪽),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 조한진희 님(오른쪽)을 초대했습니다. 느티나무도서관 김보현 사서가 진행을 맡았습니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만큼, 정확한 내용 전달을 위해 쉐어 타이핑 문자 통역 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AUD 사회적협동조합 강서영 문자통역사님이 함께 자리해 주셨고요.

 



*쉐어 타이핑 서비스란?
문자통역사가 동영상·음성·녹취록 등 소리를 문자로 타이핑해 청각장애인들의 소통을 지원하는 서비스.



포럼의 묘미, 컬렉션과 질문!

사서들이 모은 <아픈 몸과 함께 삽니다> 컬렉션과 이웃들의 궁금증과 이야기가 담긴 게시판을 가운데 두었습니다. 

장소와 거리의 한계가 무색할 정도로 집중해 열띤 논의를 펼쳤던 저녁. 

당일 함께하지 못해 아쉬워할 분들을 위해, 현장에서 오고 간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 거리두기 속  연결을 말하기, 커먼즈(commons)로서의 도서관

김보현 (느티나무도서관 사서) 
<마스크가 말해 주는 것들>에서 연결을 말하셨는데, 거리두기 속에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상황을 떠올리니 굉장히 와닿았다. 

백영경 (레퍼런스 패널) 
얼마 전에 예술에 대해 글 제의를 받았다. 인류학은 인간이 하는 모든 짓을 다루기 때문에 이것저것 안 하는 게 없지만, 갑자기 예술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하니까 막막해서 아는 예술가들에게 “코로나 시대에서 예술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다들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역할이 예술이 할 일이라고 했다. 그건 꼭 예술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우리가 다 해야 하는 역할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다 훌륭하게 하면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고. (웃음) 도서관도 연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백영경 (레퍼런스 패널) 
커먼즈는 공동영역,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어떤 공통적인 부분이다. 영어 단어 커먼즈의 유래는 마을 공동의 땅으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공유지를 말했다. 사람들은 땅을 빌려 살았고 세금을 다 내고 나면 먹고살 게 없는데 그 공유지, 즉 커먼즈에서 나오는 그 수확물을 가지고 마을에서 나누어 먹었다. 또 세금을 좀 줄여달라는 시위나 투쟁도 커먼즈를 기반으로 해가지고 할 수 있었는데, 사유지에서 시위를 하면 걸리니 공통지에서 투쟁을 했던 거다. 그런 땅은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점차 사라져갔고, 남아있는 공유지를 유지보전 하면서 현대 사회에 맞추어 새롭게 만들어내자는 게 커먼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술집, 도서관, 기숙사같이 모이는 공동의 공간을 커먼즈라고 하기도 하고, 어느 지역에서는 교회나 마을회관이 그런 역할을 한다. 도시에서는 도서관이 커먼즈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특히, 먹고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중요한 문제를 같이 의논하고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리를 주는 게 커먼즈에서 중요한데 도서관 같은 공간은 어떤 상황이든 가능하면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이야길 드리고 싶다.
 
김보현 (느티나무도서관 사서) 
느티나무도서관 직원들도 코로나 상황 속에서 도서관 문을 열고 닫음에 있어 고민이 많았다. 도서관이 연결할 수 있는 것이 많으니까. 

백영경 (레퍼런스 패널) 
도서관 운영에 있어선 답이 정해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공동체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고 함께할 수 있는 범위도 마찬가지다. “이건 꼭 필요한 일이고, 이만큼의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해야 한다”는 합의가 있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못 하는 거다. 예를 들면 혼자 사는 노인들을 돌보고 말벗이 되어주는 일. 이런 일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선순위를 미룬다.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사람답게 사는 걸 뒤로 미루면 도서관을 열 수가 없는 거다. 사회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 건강 중심 사회에서 배제되는 몸들  

조한진희 (레퍼런스 패널)
집에서 느티나무도서관까지 오는 길, 시간이 좀 걸렸다. 발목 부상으로 계단이 많은 지하철보다 광역 버스를 이용했는데 생각보다 안내가 잘 안 되어 있어 평소보다 긴 시간 이동했다. 아픈 몸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더라. 

이게 아픈 몸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가 생각을 해보면, 사람은 몸이 아프면 기본적으로 이동이 줄어든다. 그리고 정보도 굉장히 줄어든다.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정보를 얻는 시대인데 왜 정보가 줄어들지?’ 생각할 수 있다. 질병이나 생활 패턴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만, 아픈 사람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빈곤하다. 노동을 할 수 없거나 또는 제한되기 때문이다. 

또 아픈 사람들의 상당수는 ‘시간 빈곤’에 시달린다. 사회 참여에 필요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시간이 있다. 예를 들면 저는 글을 쓴다든가 강의를 온다든가 이렇게 하기 위해 음식 먹는 것부터 시작해 겨울이니까 혈액순환이 안 되니 반신욕, 족욕부터 하루 종일 해야 되는 게 많다. 그러면 물리적으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도 어렵지만 정보를 습득하는 시간도 적어진다. 그래서 아픔과 통증과 함께 사는 건 경제적인 노동을 못 해서 빈곤해진 것뿐만 아니라 사회 생활,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몸 자체가 둔화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상정하는 표준 혹은 정상의 몸이 건강한 몸을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oo중심 사회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 서울 중심 사회라고 말한다. 저는 우리 사회가 건강 중심 사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건강을 추구하고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나쁜가?”라고 물어보기도 하는데, 건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건강한 몸을 전제로 두고 그 몸만을 표준과 정상으로 삼으며 사회가 설계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계속 건강한 사람만을 표준이자 정상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아픈 사람들이 계속 삶에서 배제된다. 이 이야기를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 썼다. 

상대적 약자를 기준으로 세웠을 때 사회는 훨씬 풍요롭다. 비장애인의 몸을 기준으로 도시를 설계했기 때문에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보편적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휠체어를 타지 않는 비장애인 혹은 자기 걸음으로 보행하는 사람만을 정상의 몸으로 설정했던 거다. 그런데 장애인들이 이동권 투쟁을 해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 버스를 만들어 휠체어 이용자들도 편히 탈 수 있도록 바꾸었다. 

휠체어를 이용자를 기준으로 지하철과 저상버스를 설계했더니, 유아차를 끄는 사람에게도 편리해졌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다음 정거장을 안내를 음성으로만 했는데, 이제는 문자로 안내한다. 그랬더니 청각장애인들한테만 좋은 게 아니라 비장애인들도 음성 안내를 놓쳤을 때 문자로 확인해 더 편리할 수 있었다. 아픈 몸을 기준으로 우리 사회를 설계하면 삶이 훨씬  좋아진다. 






# 아파도 괜찮은 사회와 K-방역 

조한진희 (레퍼런스 패널)
팬데믹 상황에서 치료제가 적절하게 개발되는 것뿐만 아니라 코로나 낙인이 찍히지 않는 사회가 중요하고, 핵심이라고 본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코로나 확진자를 낙인찍지 않을 수 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코로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조사했는데, 코로나 감염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 낙인이나 비난이 더 두렵다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코로나에 감염되는 것보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게 더 두려운 이 문화는 코로나 확진자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픈 사람들에 대한 낙인이 있다. 예를 들면 질병의 개인화. 누군가 간염 걸렸으면 “걔가 술을 그렇게 먹더니 간염 걸렸네”, 위암이 있다고 하면 “걔가 평소에 짜게 먹더니 걸렸네” 하면서 질병을 그 개인의 습관의 결과로 돌리는 것이다. 그 사람이 예방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살지 않아서 질병이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문화를 질병의 개인화라고 부른다. 

그런 문화가 팬데믹 속에서 심화된 거다. 코로나 확진자도 피해자일 수 있는데 “네가 조금 더 조심했으면 코로나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많이 돌아다녀서” … 이래서 저래서 감염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과 동시에 그런 비난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레일 위에 같이  놓여 있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왜 아프게 됐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로나 관련해서도 사람들이 어떤 과정에서 코로나에 감염됐는지, 혹은 내가 왜 그 감염 라인에 놓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동선 공개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이 왜 코로나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개인이 조심하지 않았다고 하는 문화들을 뒤집으려면 확진자 혹은 연대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코로나에 감염될 수밖에 없는 이유,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던 삶의 과정을 좀 드러내는 게 필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다. 




김보현 (느티나무도서관 사서)
재난문자 확진자 동선에 관한 찬반 문제도 떠오른다. 작년 초반에는 재난문자 내용이 상세했다. 확진자가 어디에 갔고 누구를 만났는지 알 수 있었고, 인터넷상에 무분별하게 퍼지면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런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동선 공개로 인한 낙인이 우려스러우면서도, 방역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백영경 (레퍼런스 패널)
K 방역이 성공적이라고 하지만, 국내 코로나 상황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모두 바람직하진 않다. 불안의 정치에 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에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그럴 위험성이 있으니까…” 하는 건 경계를 해야 된다. 당연히 시민들에게는 알 권리가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약간의 위험성은 있더라도, 방역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우려가 더 크다고 판단되면 안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 자체가 쉽지 않고, 판단을 위해서는 불안의 정치에 지면 안 된다.

우선 개인의 알 권리, 이런 이야기가 튀어나오기 시작하면 아슬아슬해진다. 한 캠페인을 보니 국민 10명 중 9명은 코로나를 통해 본인이 낙인이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느끼며,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맥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그걸 느낀다고 차별과 배제를 안 하진 않는다. 

우리 모두 개인은 무엇이고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이 세상을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부분에서 감염병 예방이 이루어진다. 타율적이든 자율적 시민의식이든, 동기가 뭐였든 간에 함께 살아간다는 걸 의식하는 사회가 되면 방역에 있어서도 굉장히 큰 차이가 난다. 

또 코로나를 이야기하면서 방역의 성공만을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게, 코로나에 감염되었다고 전부 죽는 건 아니다. 치명율이 높은 질병이라면 “막아낸 것만으로도 다행이다”라고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들보다 산재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 심지어는 코로나 블루로 추정되는 자살자가 코로나 사망자 수보다 많다. 방역 수치에만 치중을 해 사회를 보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놓칠 수 있다. 

“한국에서 코로나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좋은 감각이 생겨나고 있는가?”라고 자문자답해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끼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한 건 있다. 집단 발생이 생기면 낙인과 차별이 확 번지지만, 활동가와 지역 사회가 나서서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애를 쓰면 또 조금씩 가라앉는다. 이태원 같은 경우도 생각보다 빨리 성소수자 혐오가 가라앉았고 대구도 다른 지역에서 손을 내밀면서 사람들이 상상한 최악하고는 다른 모습으로 가게 되었다. 그 점에서는 한국의 큰 사회는 잘 작동을 하는 것 같다. 노력해야 할 점도 많지만. 

조한진희 (레퍼런스 패널)
K방역이 성공한 이유의 상당 부분이 불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면 모든 걸 잃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프면 안 된다는 굉장한 전투력을 발휘한다, 시민들이. 아프거나 건강한 분들과 질병과 관련한 인터뷰들을 굉장히 많이 해봤는데 아프지 않기 위해서 전투적으로 사시는 분들이 많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쓰고 운동을 하고, 음식을 먹는다. 특히 가난할수록 그렇다. 지금도 취약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 아프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아픈 것을 불안해하니 이 정도로 방역했다고 생각한다.







 [후기] <팬데믹 시대, 아픔과 살아간다는 것> 포럼에서 주고받은 이야기-02에서 이어집니다.



 

컬렉션

  • F71. 아픈 몸과 함께 삽니다

    아픈 몸과 함께 사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낫지 않는 질환을 갖고 사는, 젊고 아픈, 가까운 이의 질병으로 함께 흔들리는, 돌보고 돌봄받는 사람···   아픈 몸을 둘러싼 개인과 사회의 시선과 건강의 기준, 아플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돌아보고 물음을 던지는 자료를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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