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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작가데이트 3회 - 심윤경 작가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19-03-23 조회수 : 8,996

느티나무 작가데이트 3회 심윤경 작가




지난 토요일이었죠. 3월 23일 오후 두 시에 소설가 심윤경 선생님이 느티나무도서관엘 오셨답니다. 세 번째 열린 <느티나무 작가데이트>의 초대손님이셨거든요. 
지난해 창비어린이 청소년소설 신인상을 수상한 박유진 소설가와 영화잡지 <스크린>, <필름2.0> 등에서 일해온 송순진 영화기자가 그날 낭독을 도와주셨습니다. 
기타리스트 정기훈님도 낭독회 내내 우리에게 멋진 음악을 선사해 주셨고요. 진행은 김서령 소설가가 맡았습니다.




김서령 | 
심윤경 선생님은 2002년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데뷔를 하셨고요. 2005년 <달의 제단>으로 무영문학상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장편소설
<이
현의 연애>, <서라벌사람들>, <사랑이 달리다>, <사랑이 채우다>. 이 두 권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그리고 동화책 <은지와 호찬이> 시리즈를 여러 권 출간하셨어요. 그리고 이번에 새 장편소설 <설이>를 내셨고요.

심윤경 | 안녕하세요. 심윤경입니다. 느티나무도서관에 대해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예쁠 줄 몰랐어요. 깜짝 놀랐네요.

김서령 |   오늘 작가데이트 시작 전에 갑자기 봄 같지 않은 눈보라가 휘몰아쳐서 이 일을 어쩌나 많이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화창하게 개었네요.

심윤경 |  <설이>의 주인공 이름이 윤설, 눈 설(雪)자를 쓰는데, 그래서 갑자기 눈이 오는 건가 생각했어요. (웃음)  작가데이트 시작 전에 눈이 딱 멈춘 걸 보면 설이가 기분 좋게 낭독회를 잘 진행하란 얘길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여요. 

김서령 |  선생님의 첫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여기 느티나무도서관에서 매주 낭독모임을 열어서 함께 읽는 중이에요. 이 소설 어떻게 쓰시게 되셨어요? 

심윤경 |  저는 국문과나 문예창작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이전에 소설 수업을 받아본 적도 없었어요. 서울대 분자생물학과 출신이거든요. 그런데 무작정 소설은 쓰고 싶었고, 그래서 제 이야기를 일단 쓰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인왕산 자락  동네 이야기를 그래서 쓰게 된 거예요. 제 어린 시절과 많이 닮아있죠. 소설 속 감나무도 실제로 있던 감나무예요. 

김서령 |  소설 속엔 정말 엄마를 너무나 힘들게 만드는 할머니가 나오잖아요. 사사건건 엄마를  괴롭히고 말예요. 그런데 개정판 작가후기엔 “실제 나의 할머니는 이런 분이 아니었다” 하셨어요.

심윤경 |  그 소설을 쓰고 나서 고모들이 저한테 엄청나게 화를 내셨어요. 니네 할머니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니가 이런 소설을 쓰냐고. 할머니를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냐고요. 정말 우리 할머니는 좋으신 분이었어요. 이건 소설일 뿐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고모들은 화를 풀지 못했어요. 그래서 개정판을 낼 때 그 얘길 넣은 거예요. (웃음)




동생이 계집아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조산소에서 장장 네 시간을 울고 악다구니를 한 할머니는 자기가 산모이기나 한 양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안방에 그대로 널려 있는 화투짝들을 보자 눈에 핏발을세우고 끝까지 신중하게 떼어보았다. 
“사흑싸리 껍데기! 육시럴하게 복도 없는 지집년이 나왔구나!”
나를 낳고 6년이나 둘째를 낳지 못했던 엄마는 할머니의 매서운 닦달질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3대 독자라고 해도 결혼한 바로 이듬해에 4대 독자인 나를 낳았으니 그렇게나 아들 아들할 이유도 없었지만 
할머니는 기둥처럼 꿈쩍도 않고 둘째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마라고 아이를 낳기 싫어 안 낳은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마른 몸에, 밤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에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아무 핑계도 없더라도) 부부가 잠자는 안방 문을 한 번 홱 열어젖혀야 직성이 풀리는 할머니와 같이 살자니
엄마의 배 속이 무말랭이처럼 삐들삐들 말라비틀어져 아이가 들어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김서령 |  사실 소설 속 어린 동구의 마지막이 저는 개인적으로 많이 슬펐어요. 할머니 때문에 결국 집을 떠난 엄마를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동구는 할머니를 모시고 시골로떠나기로 마음을 먹거든요. 엄마와 아버지에겐 좋은 일이었겠지만 동구는 어떡해요. 동구는 그 선택으로 정말 행복했을까요?

심윤경 |  그 소설을 쓸 때엔 그게 가장 좋은 결말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동구에게 참 무정한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동구에 대한 미안함이 그 다음 성장소설 <설이>를 쓰게 한 것 같아요. 



머리 위 까만 어둠이 동그란 빛으로 열리던 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의 생모는 방금 태어난 아기를 보육원 문 앞에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그래도 새해 선물처럼 보이도록 예쁜 옷을 입혀 과일 바구니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풀잎보육원 문 앞까지 갈 용기를 잃어서 골목 어귀에 놓인 커다란 음식물 쓰레기통에 바구니를 처넣고 도망가버렸다. 
나는 어둠과 악취 속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 바구니 밑에서는 썩은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대로 조용히, 조금만 더 견딜까? 그러면 내가 이 세상에 왔었다는 사실은 백과사전 속의 작은 쉼표만큼도 자국을 남기지 않고 잊힐 것이다.  더 이상 부끄러울 필요가 없다는 게 가장 좋은 점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울기로 결심했다. 나에게는 어릴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부끄러움을 이기는 독한 기질이 있었다. 
내 기억이 돌아간 곳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내가 발버둥치며 독하게 빽빽 울자 머리 위의 검은 어둠이 동그랗게 열렸다. 
새해 첫날 새벽예배를 보고 돌아오던 길, 새끼 고양이가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갇힌 줄 알고 꺼내주려던 풀잎보육원 원장님은 바구니에 누운 갓난아이를 보고 기겁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남아서 이 피곤한 부끄러움을 이어갔다.



박유진 |  저는 <나의 아름다운 정원> 속 동구와 같은 세대이자, 설이와 또래인 딸을 키우고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동구가 어른이 되어 설이를 키우고 있는 셈이라 볼 수 있는 거죠.

심윤경 |  어머, 그렇네요. 저도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동구가 자라 설이를 키우다니! (웃음)

박유진 |  동구가 마냥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면 설이는 독하고 강해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어른들에게 할 말도 당차게 다 하고요.

심윤경 |  저는 아이들이 할 말을 다하는 세상이 당연히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되바라지게 어른들에게 대들고, 원하는 것을 다 말하고,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 아이들이 하는 말에 어른들이 당연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바람으로 설이라는 인물을 만들었어요.

김서령 |  설이는 초등학교 6학년인데 화장을 진하게 하고 다녀요. 강하게 보이려고 말예요.




늦은 저녁 샤워를 하고 머리를 단단히 땋아달라고 했다. 이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땋아주었다. 
아침이면 나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공들여 화장을 했다. 눈꼬리가 강렬해 보이도록 진한 아이라인을 그리고 웁시팝시 레드벨벳이라는 상품명이 붙은 새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그리고 앤더슨 부인이 준 옷 중에 가장 짧은 치마를 입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 닿기 전 골목실에서 전날 밤부터 공들여 땋고 잔 머리를 훨훨 풀었다. 
충분히 마르기 전에 젤을 발라 땋은 머리카락은 아름다운 컬이 되어 굽슬굽슬하게 물결쳤다. 
나는 새빨간 입술과 여우 눈과 컬헤어로 당당하게 교문을 넘어서 내 자리까지 굉장한 기세로 직진했다.






김서령 |  출판사에서 <설이>를 출간하면서 메인카피로 내세웠던 게 <소설판 스카이캐슬>이었어요. 스카이캐슬 혹시 보셨어요, 선생님?
심윤경 |  4회까지 봤어요. 더이상은 마음이 부대껴서 볼 수가 없었어요. 너무 힘들더라고요.

김서령 | 
따님이 고3이라고 들었어요.

심윤경 |  말도 마세요. 너무 힘들어요. 나는 이제껏 그애한테 원하는 것 다 해준 것 같은데 어쩜 우리 딸은 하나도 몰라주네요. 엄마가 날 위해 뭘 했다고 그래? 이런 식이에요. (웃음) 하긴 우리 부모님도 저 키우면서 남들한테 뒤지지 않게 나를 키웠다고 늘 생색내셨는데 저도 동의한 적은 없었지만요.
김서령 |  저랑 선생님이랑 나이가 한 살 차이인데 제 딸은 다섯 살이거든요. 전 언제 다 키우죠?

심윤경 |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김서령 |  그러게 말예요. (웃음) 앞으로 설이는 어떻게 자랄까요, 선생님? 저는 그게 가장 궁금해요.

심윤경 |  설이는 이제껏 소설 속에서 그랬듯 강하게 자랄 거예요. 할 말 다 하고 주눅 들지 않고 아주 단단하게 살아남아서 이 세계 속에서 지내게 될 거예요. 저는 믿어요. 





김서령 |  먼 데서 이렇게 느티나무도서관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이용자 여러분께도 감사 인사 드리고요. 
다음 네 번째 느티나무 작가데이트는 미지 작가와 유병록 시인, 부부 작가예요. 부부가 함께 글 쓰는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들려드릴 거예요. 그때 또 만나 뵙길 기대합니다. 
오늘 심윤경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글 | 김서령 (소설가, 느티나무도서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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