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두번째 모임이 잘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하진 못했지만 나름 알찬 자리였다는...^^
커밍스의 얘기가 섬세하진 못해도 우리의 아픈 자리를 잘 짚어주는 듯합니다.
"서로 아주 다른 이유들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역사가들은 1910년 이후 시기에 대해 일차자료, 기록보관소의 문서, 회견 같은 역사연구의 기본사료를 이용하여 역사를 쓰지 않으려 한다. 한국의 주요한 역사책을 아무것이나 살펴보면, 거의 모든 책이 20세기를 결과론으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한가지 이유는 많은 문서들이 여전히 기밀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후 남북한에서는 거의 모든 문서가 기밀이지만, 일본 역시 1945년에 군국주의와 결별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전전 문서의 공개를 놀라우리만치 꺼린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이유들이 있는데, 문서의 비공개는 그 자체가 더 심각한 문제들의 징후일 뿐이다. 한국의 역사가들에게는 식민지시기는 아주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기록에서도 입증될 수 없는 저항의 신화로 흠뻑 젖어 있다."
"일본은 허세를 부리는 정복자가 아니라 계획입안자와 행정가를 모델로 삼아 한국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면밀히 감시하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식민주의를 추구했다. 그 강력하고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식민국가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본국에서 수행한 역할을 모방했다. 즉 식민국가는 경제에 관여하고, 시장을 창출하고, 새로운 산업을 낳고, 반대자를 억압했다. 정치적으로 한국인들은 거의 숨을 쉴 수 없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비록 고르게 분배되지는 않았지만 의미있는 성장을 했다. 농업생산은 1920년대에 실질적으로 증가했으며, 온실 안의 산업화가 1930년대에 뿌리내렸다. 한국경제의 성장률은 종종 일본 자체의 성장률을 앞질렀다. 최근의 조사는 1911~38년 사이에 일본 자체의 연간 성장률은 3.36%인데 비해 한국의 성장률은 3.57%였다는 것을 시사했다."
"식민체제가 1945년에 갑자기 끝났을 때 수백만의 한국인들은 이 이역만리의 동원부대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예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국에 안전하게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불만을 지녔으며, 물질과 지위의 상실을 겪었고, 종종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접촉했고, 모두 시골마을을 넘어선 더 큰 세계를 보았다. 따라서 전후 한국사회에 예전과 달라진, 불만을 품은 군중을 풀어놓아 그들로 하여금 해방 직후의 시기와 미국 및 소련의 계획을 심각한 혼란에 빠뜨리게 한 것은 다름아닌 압력솥과 같은 식민체제의 이 막바지 10년이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얘기들이죠?
다음번 세미나는 여름휴가철임에도 8월 1일날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휴가 다녀오실 분은 즐거이 다녀오시고 휴가 가시지 않는 분들은 모여서 책 읽죠.^^
다음 세미나는 제 4장 '열정, 1945~48년'입니다.
현대사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미군정 시기입니다.
커밍스는 미국 자료를 가지고 이 시기를 꼼꼼하게 분석합니다.
어떤 얘기들이 있을지, 궁금하시죠?^^
궁금하시면 놀러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