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느티나무에서는

경쟁의 논리와 헝그리 사회

작성자 : 하승우 작성일 : 2010-09-17 조회수 : 8,472

학벌없는 사회가 엮은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에 실은 글입니다.




“어떤 행복을 꿈꾸어 나는 경쟁하고 경쟁했는데

우리가 그린 미래는 드라마에 불과한 공상입니다

…일상의 무게로 비굴해진 나의 자존심도 용기도 버린 내일

우리의 꿈은 서로 다르지 않은데 꿈을 위해 꿈을 버리고

어머니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나는 이름도 없는 나사”

―자우림의 노래 ‘나사(螺絲)’ 중에서



지금 당신은 왜 행복하지 못한가?



행복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질까? 알렉산더 대왕이 전 세계를 정복하며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가 원한 건 단지 알렉산더가 가렸던 햇빛이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자신의 삶에서 행복을 느꼈다. 아니, 디오게네스는 권력이나 부유함, 명예에서 행복을 구하던 다른 사람들을 하찮게 여겼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이 원할 때 먹고 원할 때 잠을 청할 수 있는 자유인이었기에 행복했다. 어느 누가 그에게 불행한 사람이라 설득할 수 있을까?


낚시질 하는 어부에게 지나가는 사람이 말을 건다. 낚시 대신 그물을 쓰면 한꺼번에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그러자 어부가 묻는다. 많은 고기를 잡아서 무엇하냐고? 그러자 행인은 물고기를 팔아 돈을 모으고 배도 살 수 있다고 답한다. 어부는 다시 묻는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 좋냐고? 행인은 배도 사고 돈도 많이 모으면 노후에 편히 살 수 있다고 답한다. 그러자 어부는 답한다. 나는 지금 편하게 낚시질을 하며 살고 있다고. 이와 비슷한 얘기들은 아주 많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하라는 얘기들에 현명한 사람들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 나는 이미 행복하다고. 권력도 없고 돈도 넉넉지 않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미국의 사상가 소로우(H. D. Thoreau)는 이렇게 얘기했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저 먼 곳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행복을 즐기고 누리라고 가르친다. 행복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를 포기하고 있다. 권력을 잡아야, 돈을 많이 모아야 우리는 자신과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OECD국가들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지만 가장 불안하고 위험해서 교통사고율이나 암발생율이 높고 자살율도 높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문자로 해직통보를 받거나 병원에서 암진단 선고를 받고, 자동차 사고나 갑작스런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산다. 허나 불행한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행복한 미래가 찾아올 수 있을까?


비단 한국 사람들만 그런 건 아닐 터이지만 유독 이곳의 사람들은 현재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의 교육에 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세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은 안정되고 좋은 직장을 잡으면,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외국어고나 특목고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국제중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좋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미리 영어유치원을 다니면, 미래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달리는 말에도 더 채찍을 가해야 옳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누가 누구의 어떤 행복을 보장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좋은 학원에 보내기 위해 야근을 하고 알바를 뛰며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학교와 학원의 경쟁에 시달리고 짓눌려 어깨가 축 처진 아이들이 부모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는 아이들의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속이 타들어가고, 아이들은 따뜻한 대화없이 온기를 잃어버린 가정에 숨이 턱턱 막힌다. 모두가 불행한데 어디서 갑자기 행복한 미래가 불쑥 튀어나올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니 우리의 교육은 폭력을 사용한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타자에게 강요한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줄 안다. 사랑하니까 때리고 사랑하니까 잔소리하고 사랑하니까 강하게 키우기 위해 험한 곳으로 내몬다. 자신의 꿈을 보상받으려는 사랑 때문에 부모들은 아침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학교로 보낸다. 이게 정녕 사랑일까?


그러니 우리의 교육은 배우고 스스로 깨닫는 가르침이 아니라 폭력이고 매트릭스이다. 실제로는 에너지를 뽑히는 갇힌 몸이면서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행복하다고 착각하도록 만든다. 누가 나서서 이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외쳐도, 같이 짜기라도 한 듯이 모두가 등을 돌린다. 반대하는 사람은 왕따를 시키며 특별한 것들은 지들끼리 모여 살라면서 우리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서로가 서로의 폭력을 묵인하고 자신의 알리바이로 삼으며 공모한다.


제 아무리 휘황찬란한 여러 가지 지표로 자신을 정당화시켜도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불행하다. 교육은 똑같은 행복을 내세운 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몰아 그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우리 사회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아귀처럼 빨아먹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나나 우리 가족이 정녕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은 고사하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경쟁에서 이기면 행복해질까?



우리나라는 지금 서느냐 무너지느냐하는 갈래길에 섰다. 그 기본조건은 민생(民生)이다. 민중이 우선 먹어야 한다. 건전한 사회가 되려면 되도록 노동하는 자가 많고 놀고 먹는 자가 적어야 할 일이다. 대학이 늘수록 놀고 먹는 자가 늘어갈 뿐이니 많을수록 국민적으로는 손해다. 그러나 대학 수는 훨씬 줄여 학문에 소질이 있는 자로 필요한 수에만 한하게 하고 그 경비를 초등교육에 돌려야 할 것이다.…대학을 자꾸 지원하는 것은 정부가 인물 등용에 반드시 실력으로써 하지 않고 소위 간판으로 하기 때문인데 정부가 그 방침을 쓰는 것은 표면은 그럴듯한 구실을 내 걸고 사실은 특권계급이 자기네 이익, 지위를 옹호하는 제도를 지켜가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해야 우대한다 해서 실지로 필요하지도 않는, 하고 나오면 실업자가 되는 교육을 강요함으로써 농민을 착취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의 글에서



잘못된 논리를 가르치는 것은 학교만이 아니다. TV드라마나 영화, 대중문화들도, 우리 정부도 무한경쟁의 전도사이다. 남이 괴롭고 힘들어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복불복의 논리’, 어떤 수단을 쓰던 성공만 하면 된다는 ‘왜곡된 합리성의 논리’, 전 세계의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세계화의 논리’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런 다양한 논리들이 서로 맞물리며 경쟁의 피라미드를 구성한다. 어떤 능력,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이든 그 사다리에서 한 단계 올라서면 존경받고, 한 단계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쳐진다. 이긴 자에게 모든 몫이 돌아가고 패배한 자는 모든 걸 잃는다. 피라미드의 끝이 아주 뾰족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피라미드에서 밀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모두가 발버둥을 쳐야 한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냉정하고 치열한 경쟁에 지배당하고 있다. ‘공부의 신’이 아니라 ‘경쟁의 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우리는 경쟁을 거쳐야 능력이 생기고 경쟁을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강하게 가지게 된 건 불행한 역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만큼 넉넉한 사회였다면 우리가 굳이 경쟁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허나 강자만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에 우리는 싫건 좋건 경쟁을 받아들여야 한다. 적어도 내 아이는 한 단계 높은 자리에 보내려 한다.


그러니 아이들을 좋은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부모들이 밤새 줄을 서야 하고 걸음마를 갓 뗀 아이들이 영어를 따라 말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이 무거운 가방을 질질 끌며 학교로 향해야 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유서를 쓰고 아이들이 자살해도 우리 사회는 쉬쉬한다. 자살이 청소년의 주된 사망원인이고, 15세에서 19세의 청소년들이 자살충동을 느끼는 원인의 51%가 성적과 진학문제인데도, 우리 사회는 이를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못나고 약한 아이들이나 그렇지 내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자위하며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고된 하루를 보낸다. 아이나 부모나 극단적인 경쟁에 시달리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까? 한 교사는 자신의 끔찍한 체험을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10일짜리 자원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학생들의 농촌 체험 활동인데 교사로서 자연봉사를 했다. 그런데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학생이 개미들을 밟아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가서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왜 약한 개미들을 죽이냐고 물었다. 죽여도 된다고 대답했다. 너는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혀도 좋으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좋단다. 여기까지도 많이 놀랐는데 더 놀라운 대답이 이어졌다. 힘센 니가 개미를 죽이듯이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히면 너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으냐라고 물으니 아이는 대답했다.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고.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학원을 안 가도 되잖아요.” 나는 너무 놀랐다. 그 아이는 8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학원을 다섯 개를 다닌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다.”



학원을 가지 않으니 죽어도 좋다는 아이들을 둔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할까? 설령 이 아이들이 운 좋게 어른으로 성장한다 해도 우리 현실이 나아질 수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안아주기는커녕 힘겹게 경주하는 아이들에게 채찍질을 가한다. 요즘 아이들이나 청년들은 배가 불렀다거나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다라는 어른들의 막말이 아이와 청년의 영혼을 질식시킨다. 영혼이 죽은 시체같은 타자들을 보며 우리 사회는 군기가 바짝 들었다며 만족스러워 한다. 간간히 들리는 안타까운 소식은 그 사람의 나태함과 게으름 탓이지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는 그런 힘겨운 노력조차 사회에서 통하기가 어렵다. 영어사전을 씹어 먹으며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출세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드라마에서조차 다루지 않는다. 승용차로 등교하고 학원버스로 하교하는 아이들, 특목고를 다니고 좋은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경쟁의 피라미드의 윗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박이 터져라 싸우는 아이들은 그 경쟁의 사다리 중간이나 그 밑을 차지하는 아이들이다. 교육만이 아니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을 착취하며 대부분의 이윤을 독점하고,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이 재래시장이나 구멍가게들을 잡아먹고 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경쟁의 결과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IMF를 거치면서 피라미드의 규칙이 바뀌었다. 즉 운 좋게 경쟁에서 승리해도 그 승리가 평생 이어지지는 않는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언제 비정규직으로 떨어질지, 명예퇴직을 당할지 모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청년실업을 면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으로 성공해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도 언제 재벌들에게 잡아먹힐지 모른다. 더구나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용산참사’에서 증명되었듯이 우리 사회는 경쟁을 할 때 이미 강한 자들에게 유리한 규칙을 일방적으로 적용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잔인한 현실을 알기 때문에 조금 남은 중간 자리를 두고 다툰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하고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면 불안하니까 사람들이 모질어진다. 지금 내가 지키는 자리, 작은 여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가차없이 밀어내고 짓밟는다. 강자에게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약자에게는 무수한 폭력을 가한다. 경쟁할수록 풍족해지고 풍요로운 게 아니라 더 불안하고 빈곤해지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나만이라도, 우리 가족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수동적인 무모함이 경쟁의 피라미드를 보호하는 든든한 장치이다.


그러니 기득권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우리들을 극단적인 경쟁으로 빈곤하게 만든 뒤에 마음껏 조롱하고 모욕한다. 나이를 먹고 성장하며 자신의 자아를 찾고 큰 인간으로 자라기는커녕 더욱더 비굴해지고 작은 인간으로 길들여진다.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웬만한 수모는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생존의 달인이 된다. 허나 노예의 배가 부를 수는 있으나 행복할 수는 없듯이, 이런 사회에서 행복은 불가능하다.


이미 50년 전에 함석헌 선생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교육자의 혼이 ‘어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버이를 대신한 존재이기에 교육자는 우등생, 열등생을 구별하지 않아야 하고 각각의 아이들에게 맞는 나름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남보다 뒤떨어진다고 해서 그 아이를 추려내고 벌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요, 어버이의 마음도 아니다. 만일 그런 교육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무성의와 무능함을 숨기기 위한 협잡꾼이라고 함석헌 선생은 지적했다.


더구나 그런 교육은 아이들도 교활하게 만든다. 교사는 지식을 파는 사람이고 학생은 그 지식을 사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인격적이거나 윤리적인 관계를 맺을 여지가 없다. 이런 세계에서 교육은 출세를 위해 학벌을 따는 과정이지 존경과 신뢰를 배우고 배움에 감사하는 과정이 아니다. 선생이 학생을 때리고 학생이 선생을 때리는 것은 교육이 출세의 수단으로 변질된 현실을 반영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강자와 이긴 자가 약자와 패한 자를 짓밟고 욕보이는 교육을, 경쟁과 이익이 지배하는 교육을 정당화하고 있다. 왜곡된 교육과 비정한 현실이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고 인간성을 짓밟고 시민의 출현을 가로막는다.


이런 사회를 바로잡고 다시 행복해질 방법이 있을까? 교육의 위기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제 저 바닥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교육의 근본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교육개혁을 얘기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혼이 회복될 사회적인 조건을 마련하지 않고 교육혼의 회복을 애기하는 건 모래로 탑을 쌓는 것과 같다.


아이 한 명이 바르게 자라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정권이나 몇몇 교육단체의 몫일 수 없다. 이제 마을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 어렵고 복잡한 정책이나 혁명적인 조치가 필요할까?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은 그 지혜를 단순명료하게 밝히셨다.



“청소를 싫어하고, 청소를 하지 않으려고 그 시간에 도망가고 하는 것은 그 학급의 교육이 사람답지 못한 점수 따기 경쟁 교육으로, 반인간, 반민주 교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힘드는 높은 단계의 무슨 훌륭한 교육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교육을 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 생각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사실 아이들은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하는 그런 공부를 아주 싫어한다. 그 증거로 아이들은 체육 시간이 되면 몸이 아픈 아이가 아니고는 모두 좋아한다. 책에서 해방이 되어 운동장에서 뛰어놀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시간이나 과학 시간에 산이나 들에 나간다고 해 보라. 기뻐서 소리칠 것이다. 교실 청소를 할 때 보면 책걸상을 옮기거나 걸레로 마루를 닦는 것을 장난처럼 하면서 즐긴다. 일이 놀이가 되고, 그것이 또 운동도 되고 학습도 되는 것인데, 이런 아이들의 삶에서 교사는 배워야 한다. 모든 교육을 이렇게 해야 가장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한평생도 이와 같이 어떤 일을 즐겁게 열심히 하면서(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되는 삶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사람의 길이다. 정치도 모든 국민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온갖 사회 문제가 풀린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부터 아이들이 이렇게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되는 삶을 나날이 즐기도록 하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교실에서 청소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장난을 치면 “입 다물어!” “장난치지 마!”하고 선생이 야단을 치니까 그만 그 청소는 재미가 없게 되고 하기 싫어진다.”


 

이렇게 간단한 해답을 두고서 우리는 계속 엉뚱한 답을 찾고 있다. 일과 놀이, 공부가 하나로 되는 삶, 경쟁하지 않고 서로 돌보고 보살피는 삶, 그런 삶을 이야기하면 모두들 달나라 얘기를 하냐는 듯 쳐다본다. 정말 불가능한 꿈일까?




공생은 헛된 공상인가?



우리는 자연계의 법칙을 적자생존, 생존경쟁이라 믿지만 그건 잘못된 믿음이다.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P. Kropotkin)은 서로 보살핌(mutual aid)이야말로 자연계 진화의 비밀이라고 주장한다. “동물들 사이에서 경쟁은 예외적인 시기로 제한되고, 자연선택은 그 원리가 발현되기에 더 좋은 분야를 찾게 된다. 상호부조와 상호지지를 통해서 경쟁이 제거되면 더 좋은 조건들이 창출된다. 엄청난 생존경쟁 속에서―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해서 가능한 최대한도로 생의 충만함과 강렬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연선택은 지속적으로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추구한다.”
더구나 인간의 지식과 지능은 그런 경쟁을 제한하며 공생을 더욱 활성화시킬 수도 있는데, 그 방법이 바로 교육이다.


사실 서로 보살피고 공생해야 한다는 건 엄명한 자연계의 질서이기도 하다.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와 그녀의 아들 도리언 세이건(Dorion Sagan)의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1995)는 크로포트킨의 논의를 이어받는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에 따르면 생물은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가 아니라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상호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숨을 쉴 때마다 우리는,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생명체는 물과 공기를 통해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고, 지구상의 생물들은 수십 억 년 전부터 상호작용을 하며 지구의 생존조건을 유지해 오고 있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은 지구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제임스 러브록(James E. Lovelock)의 가이아(Gaia) 가설을 지지하면서 생물이 지구의 표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생물이 곧 지구의 표면이라는 획기적인 이론을 주장한다. 생명은 고립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서로 공생하는 하나의 체계로서, 즉 지구로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진화의 요인은 경쟁이 아니라 공생이다.


그러니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그 자체로 구분가능한 개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역시 단독자가 아니라 공생의 복합체이고 우리 몸 속과 몸 밖에서 살고 있는 생물에게 훌륭한 환경을 제공하고 그들의 도움을 얻는다. 인간은 수 억개의 박테리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인간과 박테리아를 비교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작고 불완전한 생명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생물이며, 35억 년 이상 계속 번성해 오고 있는 진화된 존재이다. 사실상 “모든 생물은 한 박테리아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여러 박테리아가 합병된 것이다.” 그리고 이 박테리아는 유전자를 거래하며 환경에 적응하며 공생 연합, 말하자면 공생에 의한 동맹을 꾀한다. 진화는 바로 박테리아들이 서로 공생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공생은 “결혼처럼 좋건 궂건 함께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혼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결합인 반면, 공생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서로 다른 생물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때로는 박테리아가 다른 생물의 속에서 살아가는 ‘내부 공생’도 이루어진다. 이런 공생을 통해 새로운 개체가 만들어지고 생물은 진화한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의 주장은 생물학적인 면에서도 상호부조의 원리가 경쟁의 원리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유전자도 이타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공생은 공상이 아니라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질서이다. 다만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구조가, 그리고 그런 구조를 강요하는 국가가 그런 질서를 파괴해 왔을 뿐이다. 이제 그런 구조와 국가에서 벗어나 공생의 삶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진정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


이 역시 어렵고 복잡한 대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저 멀리 있는 행복을 위해석 아니라 지금 내 자신을 위한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은 참다운 삶이 멀리 있지 않다고 봤다.



“이 세상에서 진정 공생의 길을 찾고 평화적 삶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모두가 참된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을 위한 삶이다. 우리의 모습이 본래부터 하느님이었는데 새삼스레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노력은 가장 우둔한 짓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다.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이다.”


그리고 생태계 파괴와 전쟁, 착취를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미 걷고 있다. 미국의 사상가 리 호이나키는 이 시대를 살아있게 하는 사람들을 ‘거룩한 바보’라고 부르며 “‘거룩한 바보’들이 아직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들의 연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얘기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바보 이반의 소박한 진리를 따를 때 우리는 전쟁과 물신의 시대를 넘어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시대를 누릴 것이다.




헝그리사회에서 벗어나기


악바리 근성을 지켜

깡다구 하나로 덤벼

사나이 칼을 뽑았어

벌써 잊었니? 헝그리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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