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 : 궁극의 게으름뱅이
사회를 담는 컬렉션에 대한 예비사서들의 생각을 담았습니다. 이번 컬렉션은 <D3: 궁극의 게으름뱅이>입니다. 궁극의 게으름뱅이는 시민들이 남기고 간 질문들을 통해 만들어졌는데요. 비생산적인 시간에서 생산성을 찾을 수는 없는지, 왜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오래 일하는지 등 여러사람의 고민을 통해 만들어진 컬렉션입니다. 그럼 솔직하고 때로는 진중하며 종잡을 수 없는 예비사서들의 대화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Q1. 여러분은 게을러지고 싶은 날이 있나요?
지연) 할 일이 너무 쌓였을 때요. 해야 될 일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그런데 그거 알죠. 그럴 때는 쉬어도 진짜 쉬는 거 같지 않은 거. 할 일을 외면하는 느낌이랄까. 저는 그렇더라고요.
다현) 맞아요. 문제를 미루는 건 게으름과 다르면서 또 비슷하죠.
지연) ‘아, 해야 되는데…’ 하면서 계속 누워있는 날 있으신가요?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으로 하루를 보내해버리면 너무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오는 거예요. 뭘 하지도 않고, 제대로 쉰 것도 아니고. 그래서 동료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빚지고 삽니다. 아지트 책상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지 않아서…
(지연이 점령한 예비사서 아지트 책상)
다현) 이건 잔소리 해야 돼 진짜.(웃음)
희연) 그런데 저는 쉰다와 게으름의 경계도 애매하다고 생각해요. 지연님 말대로 해야할 일이 있음에도 쉬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날이 있잖아요. 그럴 때 저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아요.
다현) 공감해요. 임시휴업하는 것처럼 갑자기 모든 걸 차단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아 몰라! 하면서 셔터 내리는 거죠. 보는 사람은 속타겠지만요. 그리고 게을러지고 싶은 날은 뭔가 정해져있지 않고 불쑥 찾아오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나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 왜?!’이러면서 긴장과 이성 어느 사이의 끈을 놓아버리는 거죠.
희연) 아니면 완벽하게 할 일을 다 끝내놓고 나서 ‘자 이제부터는 게으름 시간!’ 이럴 때도 있죠. 이불 안에서 유튜브만 보면서 히히덕거리는 그런 시간.
지연) 맞아요. 뭔가 보상처럼 게으름을 줄 때도 있죠. 나 진짜 열심히 일 했으니까 이제 게을러도 돼 이러고요.
희연) 웃긴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으름’을 ‘휴식’으로 바꿔도 다 말이 된다는 거예요. 그만큼 게으름은 쉼과 관련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쉬고, 언제 잘 쉬어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인 느낌.
다현) 음, 그럼 여러분만의 게으름을 피우는 방법이 있으세요? 예를 들어 게으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연) 우선 생존을 위한 섭식만 하고 계속 누워있는 거예요. 헉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 조금 주워 먹고, 다시 자다가 알람 없이 눈뜨고. 스마트워치 찼을 때 걸음수가 10미만으로 나와야해요.
희연) 정말 궁극의 게으름뱅이네요.
지연) 먹고 살기 위해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쓰잖아요. 그러니 이때만큼은 의식주를 최소한으로 책임지는 거죠.
다현) 반대로 의식주를 완벽하게 책임지는 게 필요한 부분 같기도 해요. 저는 인간관계에 엄청난 에너지를 쓰거든요. 그러니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내가 잘먹고 잘자는 것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해요. 이런 엄청난 노력과 집중이 게으름인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희연님은 어때요?
희연) 저는 절대로 머리쓰지 않는 게 게으름 같아요. 계산하지 않고,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즐기는 것. 그게 저에겐 게으름이에요. 그래서 게으르고 싶을 땐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잔잔하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봐요.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거든요.
다현) 어떻게 보면 게으름은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간이기도 하네요.
Q2. 요즘 여러분의 휴일은 어떠신가요?
(일동침묵)
지연) 제가 잘 쉬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도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체력과 기력을 다한 느낌? 최근엔 부쩍 일기 쓰는 날도 줄었어요.
희연) 이유가 있을까요?
지연) 일기 쓰는 날이 준 이유는 알겠어요. 글에서 자책이 너무 많이 묻어나요. 마치 감정 쓰레기통처럼 일기를 쓰며 저를 학대하고 있더라고요.
희연) 저는 반대로 막힘없이 쏟아내면 기분이 한결 나아져요. 일기장엔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들이 넘쳐나요. 배고프다. 나 뭐하는거지. 이게 일기 맞나 같은 생각의 흐름이 모두 적혀 있어요.
다현) 두 분 일기 쓰는 방식이 다른게 재밌어요. 그럼 희연님의 휴일은 어떤가요. 잘 쉬고 있나요?
희연) 잘 쉬는 지는 모르겠지만 스트레스 받을 때 휴일에 하는 게 있어요.
지연) 뭐죠?
희연) 방구조를 바꾸는 거예요. 공간이 달라지면 숨통이 트이고, 괜찮아 질 때가 있잖아요. 또 무언가에 집중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서 좋기도 하고요. 어쩔 때는 책상 위치를 바꾸고, 어쩔 때는 톱으로 침대 프레임까지 자른 적도 있어요.
다현) 이건 사는 공간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아요. 저한테 방은 큰 의미가 없어요. 그냥 옷갈아 입고, 잠자는 곳.(웃음) 방보다 밖을 더 좋아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지연) 에너지 엄청나네요. 밖에서 사람 많이 만나면 지치지 않나요?
다현) 사람한테 에너지를 얻는 쪽인가봐요. 꼭 누군가와 대화하지 않아도 사람 구경하는게 재밌어요. 그래서 휴일 대부분을 카페에서 책읽고, 영화보면서 보내는 것 같아요.
지연) 저는 휴일에 절여진 배추처럼 누워 있는데.. 스마트 거치대에 핸드폰까지 있으면 완벽하죠.
희연) 핸드폰으론 뭐하나요?
지연) 베이킹 영상 봐요! 그럼 뭔가 마음이 정화 돼요.
다현) 원래 베이킹 했어요?
지연) 네. 그런데 이제는 다 귀찮아요. 할 힘이 없는 거죠. 그래서 영상 보는게 더 재밌어요. 바쁘게 뭔가 할 필요가 없으니까 마음이 편해요.
다현) 요즘에 ASMR 같이 정적이고 휴식이 되는 영상들이 인기지만, 한편으론 이런 영상이 어떠한 정보를 담고 있는 건 아니여서 비생산적이라고 하잖아요. 여러분은 혹시 비생산적인 취미가 있나요?
Q3. 비생산적인 취미가 있나요?
희연) 친구들한테 선물 줄 때 포장을 직접해요. 이미 포장된 상품도 제 손으로 다시 꾸며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 포장은 뜯으면 그만이고, 잠시 보면 끝이여서 비생산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저는 제 스타일대로 꾸미는게 재밌고 행복해요.
지연) 취미는 아니지만 컬렉션 자료 중에 『고수의 귤 까기 아-트』라는 책 있는 거 아시나요?
다현) 귤 까기요? 귤 까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인가요?
지연) 네, 다양한 귤 까기를 알려주는 책인데 이거야 말로 비생산적인 취미의 끝 아닐까요. 종이접기책이랑 비슷해요. 공룡 모양으로 귤 까기, 하트 모양으로 귤 까기. 이런 내용이에요. 그런데 이 책 보고선 귤 까면서 멍 때리고 싶었어요.
(『고수의 귤 까기 아-트』 중)
다현) 불멍(불 보면서 멍 때리기), 물멍(물 보면서 멍 때리기)에서 나아가 이제는 귤멍인가요? 되게 재밌고 웃기다.
희연) 귤멍 완전 재밌겠는데요? 저 종이접기 정말 좋아하거든요. 뭔가 손으로 뽀시락 뽀시락 거리고 있으면 잡생각이 사라진달까?
지연) 우리 올해 겨울엔 다같이 귤멍 해봐요. 그나저나 다현님은 어떤 비생산적 취미 있으세요?
다현) 음 입장권 모으기?
희연) 전시, 영화 티켓 이런 거요?
다현) 뿐만 아니라 기차표, 버스표도 모아요. 뭔가 쓸모는 다했지만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좋아요. 입장권을 보면 언제 어디서 뭘 했는지 다 적혀있잖아요. 티켓을 보면 그 순간이 확 떠오른달까?
Q4. 각자 다른 게으름에 대한 책을 골라 보았는데요. 어떤 책인가요?
희연) 컬렉션에 궁극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만큼 무언가의 끝까지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궁극의 게으름뱅이는 자기 삶의 속도에 맞춘 사람들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가 참 와닿았어요. 책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사람은 하고 싶은 게 없어도 적당히 하다보면 어떻게든 살 수 있어서 사람이야.” 솔직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래서 적당한 삶. 자신의 삶에 여유를 가지고 돌아보는 사람이 게으름뱅이 아닐까 생각 들었어요.
다현) 희연님과 비슷한 맥락으로 저도 게으름뱅이를 정의했어요. 제가 읽은 『게으른 자들을 위한 변명』에서는 “게으름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규 교육 과정이나 사회의 지배적 규범에서 인정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해요.
지연) 되게 있어보이는 게으름뱅이네요!
다현) 그쵸. 보통 게으름은 수동적 이미지로 표현할 때가 많잖아요. 게으름뱅이는 나태하고 천하태평한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이 책은 규범에서 벗어난, 자기 삶을 이루는 다양한 방향을 찾는 사람이라고 하는게 좋았어요. 지연님은 어떠셨나요.
지연) 모든 문장이 의문문으로 끝나는 책을 봤어요. 『허튼생각』이라는 컬렉션 자료인데요. 책 속 질문들을 보면 정말 허튼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예를 들면 이래요. “한가지 비밀을 풀면 왜 늘 새로운 비밀이 생겨날까?”, “사람들은 남들과 똑같아지려고 하지?”와 같은.
다현) 제목은 허튼생각이지만 내용은 헛되지 않은 질문들이네요.
지연) 현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지만 결코 삶과 분리 되어 있지 않은 질문들이랄까요. 이런 생각이 뜬구름잡는 헛된 생각이라면 과연 허튼생각없이 사람은 발전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희연) 부제목이 ‘살아간다는 건 뭘까’인데 정말 딱 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Q5. 성장을 권하는 사회라는 말에 공감하시나요?
희연) 공감하죠. 자기계발서가 출판 시장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지연) 사실 자기계발서 별로 안좋아해요.
다현) 저도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데 왜 읽는지는 알 것 같아요. 쉽고 간단하잖아요. 한 권으로 성공 비법, 배움의 기회, 인생공략까지! 거의 만능 치트키 아닌가요?
지연) 그런데 그게 꼭 로또 같아요. 성공이란게 운이라는 것도 따르잖아요. 한 사람의 성공 사례를 봐서 뭐하나 싶은거죠. 어차피 내 인생은 따로 있는데. 또 자기계발 서적 대부분이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도 불편해요.
희연) 경제적 자유 당연히 중요하죠. 성취감과 성공도 중요하고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훌륭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적당한 성취감, 자유, 성공만으로도 살 수 있는데 사회적 기준치가 너무 높은 것 같아요. 성공과 자유는 크면 클 수록 좋다고 부추기는 것도 있고요.
다현) 또 개인의 성장보다는 사회적 성장을 우선시하는 경향도 있죠.
지연) 그러다보니 쉬고 싶은데 사회가 자꾸 달리라고 채찍질하는 기분이에요. 번아웃도 이런 맥락에서 오는 것 같고요. 가끔은 이 세상이 거대한 공장이고, 나는 그 부속품 중 하나. 언제든 대체 가능한 아주 작고 작은 부속품이 아닐까 생각해요. 나 하나 사라져도 돌아갈 것 같고, 조금만 느려도 날 대체할 부속품들이 아주 많게 느껴져요.
다현) 이런 하나하나가 압박과 불안이 되어 나를 더 힘들게 하죠. 하지만 우린 알고 있잖아요. 궁극의 게으름뱅이도 세상엔 필요하다는 걸.
희연) 게으를 권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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