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처럼>님의 글을 읽고 참 반가웠습니다.
적어도 “누가 보면 목숨걸고 도서관에 헌신한 사람인줄ㅋㅋ”와 같은 한 마디보다 더 강하고 진지하게 제 자신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도서관이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어야하는가’ 뿐만 아니라 ‘자원활동가와 자원봉사의 차이’등을 도서관이 규정해준 정의가 아니라 자원활동가의 눈으로, 이용자의 눈으로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강물처럼>님의 글을 읽으면서 어제 있었던 설명회가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외람되지만, 한 가지 정정해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글 내용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소장님이 글을 끝까지 들려주고 나자, 부소장님이 활동설명회를 읽어 주십니다. 한참을 같이 따라 읽으며 설명을 듣고 있는데, “이 글은 홈페이지에도 올라와 있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고, 해야할 다른 이야기를 하자”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제 생각에 이 말을 하신 분이 <강물처럼>님의 글을 읽으신다면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저렇게 이야기 하지 않으셨고, 아마 <강물처럼>님의 개인적인 느낌도 담지 않으셨나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그 분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죄송하지만요, 기존의 독서회같은 경우에는, 그림책 읽는 어른들의 모임을 모집한다면요, 거기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 모인 가운데 지금처럼 이렇게 구체적인 것을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 이것은 홈피에서 상세하게 안내를 해 주셨고 여기에도 있어서 상세하게 안내해주시지 않으셔도, 다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예..... 간략하게 안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내용은 관심있는 분들이 모였을 때 논의되고 설명되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말이라는 게 참 요상해서, 누가, 어떻게, 어떤 말투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하느냐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다른 느낌으로 와닿습니다. 또 사람은 원래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 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제 생각으로 덧씌우지 않기 위해 설명회를 녹음했고 듣고 또 들으면서 도서관을 이해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아마 설명회 도중에 자료물로도 달라고 하신 많은 분들도 같은 마음에서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 집중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개인적인 감정을 빼고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윗 분의 의견에 이어 “옳소”, “찬성”이라고 동의하신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았지만, 결국 <강물처럼>님의 의견대로 도서관활동설명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모두들 이해하고 수긍하셨구요. 만약 <강물처럼>님께서 생각은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면 ‘다수의, 힘 있는’ 목소리에 밀려 설명회는 중단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의견을 내셨다 하더라도 ‘다수의, 힘 있는’ 목소리들이 받아주지 않고 밀어붙였더라면 역시 설명회는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게 바로 소통이 아닐까요? 말하려 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듣기 싫은 말도 들으려고 애쓰는, 약한 사람이 굳이 용기를 내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맞춰가는 것. 저는 이것을 느티나무가 말하는 ‘소통’이라고 배웠습니다.
어제 설명회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 바로 ‘소통’이었습니다. 저 또한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갈등의 원인이 ‘소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가장 쉽고 확실한 해결방법도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물처럼>님의 글을 읽고 이 부분을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바로 ‘자원활동가 정체성’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설명회를 주최하신 분들의 말씀처럼 “~라고 들었습니다. ~했다고 합니다”가 아니라 제가 8년 동안 보고, 듣고, 함께 느껴온 일이기에 더 확신을 갖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설명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 아시겠지만, <강물처럼>님이 “그 속에 앉아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때론 헛웃음을, 때론 야유를, 때론 절망하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감정표현이라는 것이 본능적이기에 미처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많은 자원활동가들이 스스로를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흥분안하려고 했는데...”, “제가 흥분을 잘 안하는 사람인데요...”라고 운을 떼신 것을 보니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느티나무를 위해서 희생했는지 너희는 아느냐!”
“우리에게 느티나무란 나와 가족그 이상이었다. 그러한 우리의 마음으로 느티나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도대체 너희가 뭐라고, 우리를 이렇게 서운하게 만드느냐?”
표현과 정도는 분명 다르지만, <강물처럼>님과 같이 저도 여러 자원활동가분들의 말씀들이 그렇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분명 저도 그런 뜻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는 도서관이 처음 문 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분도, 자원활동가 회장단을 오랫동안 하셨던 분도, 청소년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아이의 엄마도, 앞으로 느티나무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싶어 찾아온 예비자원활동가도 있었습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다른 시기에 느티나무에 들어와 다른 자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저렇게 ‘똑같은’ 심정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을까요?
느티나무에서 8년 동안 일하면서 지금과 비슷한 경우를 가끔 보아왔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욕심만 안내면 나는 괜찮을꺼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명회 때 말씀드린 것처럼 느티나무도서관은 사람의 몸과 같았습니다. 어느 한 구석이 아프면 다른 곳까지 쑤시고 저렸습니다. 목이 아픈데 두통이 오고, 허리가 아픈데 움직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책을 고치는 일을 하면서 도서관은 사람과 같다는 생각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시트지로 책을 잘 싸야 책이 덜 망가집니다. 책을 잘 꽂고 정리해야 책이 덜 망가집니다. 책을 너무 빽빽하게 꽂으면 책을 뽑다 망가뜨리게 됩니다. 이용자에게 보수자원활동가가 있다고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재료와 도구로 책을 고쳐도 이용자들이 붙여온 테이프 한 방에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기도 합니다. 이용자의 관심과 배려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굳이 ‘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라는 도서관학5법칙을 말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각 팀별로 맡은 역할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라는 게 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 여기서 ‘사람’이 실무 스태프만을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도서관문화’는 몇 명의 스태프가 아니라 기부자, 자원활동가, 이용자, 잠재 이용자들까지 모두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걸 지난 10년동안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_ 사람만의 희망이다_ 박영숙_ [느티나무 소식지 24호 2010년 5월] http://www.neutinamu.org/gnuboard4/bbs/board.php?bo_table=new_01_01&wr_id=49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느티나무 조직개편에 보수팀은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책싸기를 그만 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언젠가 갑자기 “이제 책보수를 그만 해야 할 시점”이라는 얘기를 들을까봐 솔직히 불안합니다.
딸아이가 고쳐달라고 한 그림책은 아직 구석에 쳐 박혀 있는데 매주 월요일이면 느티나무에 책을 고치러 갑니다. 내 책이라면 버렸을 지도 모를 망가진 책도 고칠 수 있을 때까지 고쳐보자고 애쓰는 자원활동가들도 많습니다. 1cm 길이가 좋을지, 1.5cm가 좋을지 별것도 아닌 한지의 길이를 두고 고민하는 웃기는 일들이 느티나무 자원활동가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디 보수팀 뿐이겠습니까?
시트지를 자를 때 사선방향이 좋을지 직선방향이 좋을지, 이용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안녕하세요?”가 좋을지 “어서 오세요”가 좋을지... 자원활동가들이 함께 웃고 일하면서 그 안에서 생각하고 고민한 수많은 시간들은 “이제 그만 해야 할 시점”이라는 말 한마디로 그만 둘 수 없는 그들만의 시간으로 이미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도서관이 원하는 일만, 도서관이 시키는 일만 했더라면 이렇게 절망하지 않았겠지요. 어차피 도서관이 다른 일을 또 줄테니까요.
솔직히 저는 그동안 자원활동을 얼마나 오래해왔나 또는 얼마나 자주 도서관에 와서 일하느냐에 따라 느티나무에 대한 애정과 자원활동가로서의 열정을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분들과 이야기조차 제대로 나눈 적 없으면서, 섣불리 숫자와 양으로 자원활동가들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큰 착각이고 잘못이었습니다. 어제 마이크를 통해 울려오는 떨림과 흥분속에 그분들의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오만하게도 8년이라는 숫자에 갇혀 정말 중요한 걸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자료와 기록을 찾아보아도 그분들이 느티나무에서 보낸 시간의 깊이는 나오지 않습니다. 6백쪽의 자료를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6백 박스의 책을 새 도서관으로 나르며 자원활동가들이 들이마신 시멘트가루는 나오지 않습니다. 빛을 찾기 위해 수십 번 자리를 고쳐가며 슬라이드 사진을 직접 찍어보지 않으면, 찰칵하는 깜빡임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극장자원활동가들의 고민과 노력이 담겨있는지 모릅니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지요. 그런데 그 짐작이 사람을 참 초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설명회를 위해 준비해 오신 글을 읽으시는 것을 보면서, “읽지 말고 말해 달라”는 어느 자원활동가의 마음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읽을 수밖에 없는, 함께 한 시간들이 없기에 말 할 것도 없겠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동안 느티나무와 자원활동가, 그리고 자원활동가들끼리의 관계는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렇고 그런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머리로는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마치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오죽하면 자원활동가 담당자를 찾았을까요? 그나마 앞에 앉으신 네 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자원활동가와 함께 고민하고 일 해왔기에, 논리적이고 조리있게 설명하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리라 믿었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늘 하던 대로 우리 옆에서 말해주었다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시대적 변화와 요구”를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이제 너무 힘들어 못할 것 같아”라는 말로 모든 게 이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오죽하면 박영숙 이사장님을 찾았을까요?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이고, 그래서 함께 하자며 손 내밀던 분이었습니다. 느티나무 구석구석에서 함께 일해 온 자원활동가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알아주실 꺼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를 통해 느티나무에 오신 분들은 지금의 상황이 더 이해가 안되었을 것입니다. "살인적인 스케쥴"로 우리들에게 5분도 못내어줄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걸 알기에 더 보고싶어 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설명회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싶어 했을까요? 내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내 꿈이, 내 일터가, 내 미래가 좌지우지 된다면 어느 누군들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까요? 표현의 미숙함을 떠나서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는 그것을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요?
마이크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때론 생목으로 외치면서까지 왜 그렇게 사람들은 말하고 싶어 했을까요? 정말 교양없게 말이죠.
느티나무에서 자원활동가 웰컴파티를 하거나 송년회를 할 때마다 계획했던 시간을 훌쩍 넘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가 사람들이 마이크만 잡았다하면 놔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시다시피 대부분의 자원활동가들이 아줌마들입니다. 하고 싶은 말 있어도 못하고, 하고 싶은 일 있어도 못해온 아줌마들이죠. 세상에서 노동시간대비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아야할 직업가운데 하나가 전업주부이기는 하지만 액면가 0원, 무임금노동자이기도 하죠.
그런 아줌마들에게 ‘꿈’과 ‘열정’이라는 단어는 아줌마의 가슴을 미치도록 뛰게 만들었습니다. ‘자율’, ‘자발’이라는 단어는 느티나무에 미쳐서 들어가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꺼이 즐기며 스스로 일하는 일터에서 하루아침에 이제 나가야할 시점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동안의 꿈과 열정이 ‘노동’으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역시 우린 무임금노동자이구나 절망하기도 합니다. 어느 자원활동가의 말씀처럼 “해고당하는 느낌” 딱 그것입니다. 느티나무와 자원활동가의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 많은 사람들의 꿈과 열정도 그렇게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내가 일할 곳이 없어졌는데 묻고 싶은게 당연합니다. 누가? 왜? 어떻게? 계속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말할 기회를 잡자마자 앞뒤 안가리고 묻기 시작한 겁니다. 대답도 듣기 전에 또 묻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제 상처를, 우리의 상처를, 그들의 상처를 들어 내놓고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병은 여러 사람에게 알려야 잘 고칠 수 있습니다. 아픈 곳을 말해야 약도 처방할 수 있습니다. 아픈 곳을 말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상처는 보지도 듣지도 않겠다면 어떻게 병이 나을 수 있을까요? 그 상처가 무엇 때문에 생긴 지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고칠 수 있쟎습니까? 우는 아이 당장 떡 하나 먹여준다고 끝날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저에게 느티나무는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기 싫을 때 안가도 되는 곳이 아닙니다. 하고 싶고, 또 해야 할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일터이자, 제가 함께 일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삶터입니다. 모든 자원활동가들이 그렇지 않을까요? 느티나무 구석구석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과 역할을 꾸준히 하고 계시니까요.
느티나무 누리집에 실명으로 올린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쓴소리를 한 뒤 느티나무에 어떻게 들어가지? 쌤들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하지? 안녕이 안녕이 아닐텐데 서로가 어색한 웃음과 인사를 해야 할텐데,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어색한 만남을 해야할까? 하고 말입니다.
“...변동되는 사항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영주 도서관문화발전소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는데, 믿었던 사람도 변하는데, 13년 동안 지켜온 자리도 그렇게 변하는데...그 말씀이 오히려 두렵고 무섭기도 합니다. 어쩔 수없이 바뀌는 게 생기더라도 저희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꼭 바꿔주십시오.
사람과의 관계는 지금처럼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아카이빙 워크숍 6회차 자료를 읽다가 가슴먹먹한 시를 찾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http://www.neutinamu.org/gnuboard4/bbs/board.php?bo_table=03_05_sarang&wr_id=7866
상처가 더 꽃이다..... 유안진
어린 매화나무는 꽃피느라 한창이고
사백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 섰다
둥치도 가지도 꺽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가
백년 못 된 사람들이 매화 사백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도 맡아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