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느티나무에서는

"그냥.. 대충 사는 거에요.."

작성자 : 박영숙 작성일 : 2005-03-22 조회수 : 5,913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자꾸 눈물만 나와 자판을 흐려버립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오늘도 학교를 마치고 고운아이들이 찾아오는 날이었습니다 한 녀석도 딴청부리는 아이가 없었는지 멀리 고기리의 아이들까지 평소보다 일찍 도착해 서둘러 떡국을 퍼담느라 분주하면서도 다들 좋아하는 떡국 따끈할 때 같이 먹게 된 것만 흐뭇했는데.. 얼마 전, 살고 있던 비닐하우스의 철거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근처의 새 하우스로 옮긴 한 아이와 마주앉으며 그저 다행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던 짧은 생각으로 무심히 던진 한 마디 "우리 누구누구, 새 집으로 옮기니까 어때, 전보다 좋니?" 요사이 부쩍 얼굴이 퍼석해진 그 아이 눈을 맞추려는 제 시선을 피하며 "몰라요!.. 그냥 대충 사는 거에요…" ...쿵!하고 커다란 돌에 맞은 듯 가슴이 먹먹해지며 울컥 눈물이 솟는 목구멍으로 그저 바보처럼 연신 숟가락을 놀려 떡국을 밀어넣었습니다 이제 겨우 열 살인데.. 디지몽이 하나 갖고 싶어 몇 달씩 애를 태우며 투정을 부리고 신발끈이 떨어져 슬리퍼를 신고 학교에 다니다 새로 사준 샌달 한 켤레에 햇살이 되어버리는 아이 아직도 살금살금 등뒤로 다가가 덥석 안아주면 젖먹이 아기처럼 얼굴을 부비며 품안으로 파고드는 나이인데.. 방학교실을 처음 열던 무렵 번번이 약속 시간보다 1시간도 더 이르게 나와 차를 기다리고 선 아이를 보며 부모 품에서 응석을 부려보기도 전에 한 사람은 떠나보내고, 남은 한 사람에겐 버림받고.. 그래도 정 깊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셔 이 녀석은 다행이다, 사랑을 알 테니.. 했었는데.. 가을로 접어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 9시가 지난 늦은 시간까지 불기 하나 없던 부엌에 나와 그제야 라면 물을 올리다 그래도 사람 왔다 반기며 하우스 비닐 문을 활짝 열고 눈물로, 하소연으로 손을 놓을 줄 모르시던 할머니.. 그 뒤로 슬금슬금 다가와 물이 다 졸아가는 냄비와 연신 눈물을 훔치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며 뒷덜미만 긁적거리던 그 아이를 보고 온 적이 있었지요 그러고도 다시 한 번 찾아가 살피지 못하다 특수작물 재배지역이라는 당국의 고마운? 배려로 다행히 집이 통째로 헐리진 않았다는 것만 반가워하면서 또 그렇게 하루하루를 미루며 무심했는데 그래도 손주 하나 잘 키워야 한다는 한 가닥 의지마저 팍팍한 삶에 지쳐 저만치 밀어내고 있었던 어르신들 곁에서 그 열 살짜리 가슴에 박힌 상처가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던 걸..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건, 아니 제일 끔찍한 건 어린 아이가 좌절을, 포기를 배워버리는 일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달라질 건 없다고, 네게 주어진 삶은 이만큼이라고 냉혹하게 쏘아부치는 세상 앞에서 조금씩 현실을 배우며 순응하게 되고 마는 아이들 그들에게 무슨 배짱으로 용기를 강요할 수 있나요 무얼 담보로 희망을 보장한다 약속할 수 있을까요 문구점 오락기 앞에 넋을 잃은 아이를 끌어다 수학 문제집을 푼들.. 어둡고 냉기 도는 궁색한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아이를 붙잡고 꿈과 상상의 세계를 그린 파스텔 빛의 그림책을 읽어준들 그 상처투성이 작은 가슴을 잠시라도 덥혀줄 수 있는 건지… 사람들을 보며 늘 이렇게 말하곤 하지요 지금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너무 작지만, 몇 해를 지내고 나서 그 아이들이 뭔가 선택할 나이가 될 때 그래도 우리가 나누려 했던 믿음과 기대가 그 아이들을 지켜줄 거라고.. 하지만 오늘은 그런 다짐도 공허한 울림으로 잦아들고 마네요 무심한 시간은 12월로 접어들며 또 한 해를 밀어내고 있는데.. 첫 눈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멋진 산타역을 계획하는 부모들 그 그늘에서, 유난히 눈이 많던 지난 겨울 폭설로 무너진 하우스 천장을 떠올릴 아이들은 또 몇일지… 없는 사람들에겐 그래도 여름나기가 수월하다고 하지요 자꾸 비를 뿌리며 하루하루 이만큼씩 차가워지는 바람 속에서 이 겨울을 또 어떻게 견뎌낼 지.. 그저 누구를 앞에 두고 엉엉 울고만 싶은 이 모자란 어른들은 어디서 다시 지혜를 찾고 용기를 얻어야 하나요 잠이 오질 않습니다… (200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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