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보도된 느티나무

시민의 힘을 기대한다면, 도서관을 돌아보라_인천문화재단 플랫폼05,06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15-05-15 조회수 : 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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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힘을 기대한다면, 도서관을 돌아보라


“지난 천 년 동안 세계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 백 명을 꼽으라면 누가 떠오릅니까?” 몇 달 전 도서관을 방문한 인사가 질문을 던졌다. 밀레니엄 특집으로 제작되어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영상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평소 사람이든 책이든 앞에 수식어를 달아 열 명씩 백 권씩 뽑아놓은 데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 쪽이라, 어디선가 이야기를 듣고 귀 밖으로 흘렸던 기억이 났다. ‘간디, 다빈치, 갈릴레오, 에디슨,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은 당연히 들어갔을 테고, 혹시 채플린이나 마오는…?’ 몇몇 궁금한 인물들을 떠올리는데 그가 다시 물었다. “1위가 누구였을 것 같아요?”
 
답은 구텐베르크. 귀가 번쩍 뜨였다. 그제야 그 사람이 도서관에 들어서면서 질문을 떠올린 까닭을 알 것 같았다. 한 세기도 아니고 천 년을 훑어 딱 백 명을 고르면서 발명가, 예술가, 정치가, 인권운동가… 분야별 균형까지 맞추려니 의견이 분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구텐베르크가 1위로 선정되었다면 나머지 99명이 이뤄낸 혁명적인 일들에 인쇄술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에는 모두 공감했다는 것 아닐까. 실제로 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술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서구 근대사회의 형성과정에 밑거름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던 성서를 많은 사람이 직접 읽고 해석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사大赦1)와 더불어 종교개혁을 일으킨 결정적인 동인이었다.
 
책 한 권을 필사하는 데 두 달씩 걸리다가 일주일 만에 몇 백 권씩 찍어낼 수 있게 되자 많은 사람이 글을 배우고 읽기 시작했고 라틴어 외에 다양한 언어로 책이 발간되었다. 양만이 아니라 질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인터넷이 가져온 오늘날 정보의 대폭발에 못지않은 변화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2) 구텐베르크에 대한 평가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고, 특히 한국에서는 직지와 연관지어 금속활자에 대한 논의가 계속 진행 중이라3) 여기서 자세히 다루기에는 무리다. 다만 ‘읽는다는 행위’가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이의 삶을, 생각을 흔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돌이켜보고자 한다.
어느 때보다 지금 ‘생각하는 시민의 힘’이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Cogito, ergo sum4) - 생각하는 힘을 잃는다면?
 
세월이 흐르면서 지식과 정보가 생산되고 전파되는 매체나 형식은 크게 달라져도 읽고 생각하는 행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책과 도서관이 불태워지고 파괴된 수난사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책 읽는 사람들은 은밀한 공간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권력자들에게 ‘위험’한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책과 도서관을 파괴하게 만든 것은 두려움이었다. 책은 물음표를 떠올리게 만들 것이고, 물음표는 통제할 수 없는 정신적 성장으로 이어져 결국 자유를 꿈꾸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공공도서관의 역사가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흐름 속에 녹아있는 배경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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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대중에게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전 국민에게 라디오를 보급하고 세계 최초로 TV까지 동원한 그의 정치선동의 기록을 보면, 어쩌면 그가 대중의 생각하는 힘을 ‘부인’했다기보다는 생각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법을 잘 알고 활용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그 엄청난 힘을 잘 알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의 말들은 지금도 ‘어록’처럼 회자된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분노와 증오가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 가운데 특히 다음 한 마디는 생각하는 힘을 잃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 수 있는지 무력감이 느껴질 만큼 잔인하게 각인시킨다. ‘모든 일은 우리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위임한 것이고 그들은 그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괴벨스가 아무리 탁월한 선동가였다고 해도 어떻게 6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독일국민들이 동원되었는지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나의 부족한 상상력에 실마리를 준 것은 루돌프 아이히만이었다. 수백만 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실무를 맡았던 그는 전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살다가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납치되듯이 체포, 압송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다. 아이히만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은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고 만일 명령을 거역했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그리고 누구든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자신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게 된 독일 출신 유대인 철학자 아렌트는 ‘평범성’이라는 낱말을 떠올린다. ‘놀랍게도’ 그는 악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긴 재판과정의 대부분을 그저 출세를 하려고 끊임없이 기회를 찾으며 살아온 시절에 대한 넋두리로 채운다. 아렌트가 그에게 발견한 것은 타인에게 공감할 줄 모르는 사유의 무능함, 말하기의 무능함이었다. 아렌트는 아마도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파멸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표현했다.
 
그 예상 밖의 평가와 해석을 처음 접한 순간 나는 의식의 진공상태로 던져지는 것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이해할 수 없이 맞닥뜨려온 얼굴들을 비로소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대한 배신감으로 분노와 저주를 퍼부은 유대인들도 그녀가 말한 평범성을6)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의 비범한 통찰력에 감탄하면서도 틀림없이 예외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방어본능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걸 확인할 자료들을 찾다가 대학시절 읽었던 책을 다시 만났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저자 잉게 숄의 친 동생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는 뮌헨 대학의 학생들이었다. 당시 나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독일 곳곳의 보호시설에 있던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들을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집단 학살하고 있었다. 갈렌 신부의 설교를 듣고 비로소 히틀러의 경제부흥에 가려진 실체를 알게 된 숄과 친구들은 ‘백장미’라는 유인물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교 건물 위에서 백장미를 눈꽃처럼 뿌리다가 잡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그 유인물들 속에서 결국 (누구든 같은 상황에 놓이면 자기처럼 했을 거라고 장담했던) 아이히만이 틀렸음을 증명해주는 구절을 만났다.
“무책임한 어두운 충동에 몸을 맡긴 지배자 무리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고 통치를 허용할 만큼 문화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다.”
 
 
생각하는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새삼 무거운 과거의 인물들을 들춰내는 까닭은 지금도 괴벨스나 아이히만의 그림자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섬뜩할 만큼 도처에서 마주칠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 드리우는 순간은 없는가 하는 질문도 밀쳐내기 어렵다.
문제는 이것이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공포영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읽고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릴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인했다면, 이제는 멈춰서 직시하고 돌아보아야 한다. 좀처럼 성찰이나 사유와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내달리는 지금 이 사회에 대해서.
 
최근 출판계와 연구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사회 담론’은 많은 사람이 ‘임계점’에 달했다고 말하는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피로사회, 팔꿈치사회, 격차사회, 무력사회, 껍질사회, 과시사회, 사회 없는 사회까지….
시장에서 불안 마케팅의 힘을 발휘하는 자본은 우리에게 적당히 열광하고 적당히 무감각하며 적당히 잊어버릴 줄 아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국제관계는 다시 ‘냉전시대’를 소환하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교육감 한 사람의 선거법 위반 판결로 추진 중이던 교육정책이 순식간에 날아간 것처럼 발칵 뒤집어놓는 언론의 경쟁에는 아예 귀를 닫고 싶어지기도 한다. 공공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가능성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회의도 든다. 공감능력의 퇴화를 의심하게 만드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단식농성장을 찾아 ‘폭식투쟁’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분노일까 절망일까 무력감일까. 자본이나 정치권력, 법과 제도의 문제만도 아니다. 일상의 속살에 배어있는 권위주의, 집단주의, 차별, 패배의식 같은 것을 걷어내는 것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면 시민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삶 속에 성찰과 사유의 틈을 벼리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어지간히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거나 특별히 운이 좋지 않으면 좀처럼 생각할 틈을 갖기 힘든 세상 아닌가.
먼저 지역마다 도서관이 제 몫을 하고 있는지 살피보기를 바란다. 고요하게 빠져들 수 있는 사유의 시간이 열려있고 지극히 ‘사적’인 읽기의 권리까지 보장되고 있는지, 역사와 사회를 읽을 수 있는 충분한 자료를 갖추고 각 이용자들의 상황과 여건, 요구에 따라 잘 제공하고 있는지.
 
 
도서관이 주목해야 할 두 가지 – 장서 & 정보서비스
 
읽고 사유하는 힘을 말하면서 도서관을 강조하는 까닭은 ‘고유성’과 ‘상호작용’ 때문이다. ‘고유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다양성’이라는 말로 담기 어려운, ‘오롯한 각자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책은 중립적이지 않다. 도서관에는 다양한 시각과 경험과 이론을 담은 책들이 서로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주제별로 나란히 꽂혀 있다. 특정한 시각으로 거르거나 정제되지 않은 채 읽는 이의 이해와 수용, 반론 혹은 확장된 상상을 기다릴 뿐이다. 내면에서 무엇인가 흔들리고 꿈틀거리는 것은 절대로 단체로 줄 세워놓고 가르칠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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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이 보태지거나 누군가 책을 읽으려고 뽑아갈 때마다 그 균형점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용자는 무수히 많은 책을 건너뛰어 한 권을 만난다. 어떤 책은 손끝으로 스치거나 잠시 눈길만 머물고, 어떤 책은 서문, 목차, 후기 따위를 훑어보기도 한다. 그 사이 책들이 빚어낸 긴장이 그의 내면으로 스며든다.
같은 책을 선택하여 읽더라도 고유함은 침해받지 않는다. 도서관은 읽기를 강요하지 않으며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가르치려들지도 않고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거나 점수를 매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공공성’에 바탕을 두면서도 서비스가 획일적이고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비밀이다.
 
도서관은 요구받은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이용자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얻고 활용할 길을 찾아가도록 돕는다. 그 과정을 통해 도서관은 이용자들의 요구와 필요를 파악하고 지역사회를 이해하게 된다. 이 상호작용은 이용자의 자발성과 정보활용능력을 북돋울 뿐 아니라, 도서관 장서의 수준에도 힘을 발휘한다. 바로 그 지역, 그 도서관에 가장 적합한 목록이 실시간으로 만들어지고 꾸준히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들이 모여 선정한다고 해도 획일적인 목록을 만들어 뿌리는 방식으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효과다. 또한 지적 자극과 다양한 정보자원으로 가득 채워진 도서관은 주어진 문제에 대처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보요구를 불러일으키는 환경이다. 갈수록 무감각과 무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렇게 역동적인 상호작용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공도서관의 철학은 ‘공공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는 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책을 읽을 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책 따위는 거리가 멀다’고 여기는 잠재이용자들까지 고려해야 한다. 먹고사는 일이 해결된 뒤에나 생각할 수 있는 ‘문턱 높은’ 문화자본이 아니라, ‘먹고사는 일을 어떻게 잘 해나갈지’ 답을 찾고 힘을 키우도록 북돋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1990년대부터 이어져온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성찰에 답을 얻고 ‘풀뿌리’ 시민사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도서관에서 ‘보이지 않는 문턱’을 없애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전국 공공도서관의 수가 930개를 넘어섰다. 그동안 시설을 확충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면 이제 콘텐츠를 채우고 내실을 다져야 할 때다. 계속해서 인력과 예산도 세우지 않은 채 도서관을 짓는 데 매달린다면 결국 제몫을 하지 못하는 시설들만 남겨질 것이다.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다. 각 도서관이 성찰과 사유, 대안을 모색하는 상상력의 공간으로 자리 잡으려면 먼저 장서로 사회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이 순응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모색할 수 있도록 정보요구를 불러일으키고 북돋우는 정보서비스에 천착해야 할 것이다.
 
인천시가 15번째 책의 수도로 선정되었다. 예산의 65%가 ‘이벤트’에 할당된 것을 놓고 독서 출판계 관계자들이 아쉬움과 걱정을 쏟아내기도 한다7). 하지만 많은 사람의 이목과 응원이 모이고 있는 만큼 멋진 반전을 기대한다. 올 한 해 지역 곳곳에서 도서관이 제몫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부족한 장서와 사서를 충원할 방법을 찾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그것이 눈부시게 이벤트를 치러내는 것보다 백 배쯤 ‘책의 수도’다운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모쪼록 인천시가 세계가 부러워하고 경의를 표하는 책의 수도가 되길 바라며 응원을 보낸다.
 


각주
1) 고해성사로 죄가 사면된 뒤 남아 있는 벌을 교황이나 주교가 면제하여 주는 일. 면죄부.
2) 이용준, 김원제. 『구텐베르크의 귀환』. 이담북스. 2012.
3) 2005년 서울디지털포럼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앨 고어 전 미국부통령의 발언. 그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고려를 다녀간 교황사절단을 만났었다는 사실을 스위스 바젤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되었다고 언급해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발언을 실마리로 문헌조사와 인터뷰를 거치고 유럽 여러 나라의 박물관 등을 취재하여 『구텐베르크, 고려를 훔치다』라는 제목으로 제작된 다큐 프로그램이 지난해 ‘올해의 방송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제시한 명제.
5) 박영숙. 『꿈꿀 권리』. 알마. 2014. 202쪽.
6) 한나 아렌트의 문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되었다. ‘평범성’으로 해석된 원문은 'banality'. 흔히 ‘진부하다’는 뜻으로 번역되는 단어다. 진부할 만큼 익숙해져서 전혀 특별할 것이 없다는 뜻을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7)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을 어이할꼬」, 『주간동아』, 2015년 4월 20일. 통권984호, 3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