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보도된 느티나무

[오마이뉴스]내 아이도 느티나무처럼 자랄 수 있습니다.(06.11.24)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06-12-02 조회수 : 4,713

내 아이도 느티나무처럼 자랄 수 있습니다
박영숙 관장의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를 읽고
텍스트 크게보기텍스트 작게보기  문동섭(surfingman) 기자   

어린 시절 저는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에 갈 때마다 '방천'이라 부르던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 놀곤 했습니다. 놀이터라고 해서 미끄럼틀, 그네, 시소 같은 놀이기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이 열 명 정도는 무난히 뛰어 놀 수 있는 널찍한 공터가 다였습니다.

그 공터에 내리쬐는 햇살은 유난히 따뜻했었고, 옆으로는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좋았습니다. 또 공터 전체가 모래보다도 더 부드러운 흙으로 덮여 있어 넘어져도 다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공터에서 유일한 놀이기구는 10살짜리 꼬마 두 세 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야 겨우 한 바퀴 돌 수 있을 정도의 큰 나무였습니다. 저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 나무를 중심으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놀이를 하며 신나게 놀곤 했습니다.

비가와도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가 든든한 우산이 되어주었기에 우리의 놀이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또 가을이 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열매가 열리는데, 저를 비롯한 아이들은 떨어져 있는 열매를 모아서 서로 던지며 놀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아버지 손을 잡고 방천에 바람을 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빠, 이 나무는 누가 키운 거야?"
"글세…, 누가 심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자라기는 혼자서 무럭무럭 자란 거야아~~."
"그럼, 저 나무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
"하하하! 그럼, 아빠보다도 많을 걸!"


누군가 먹을 것도 주지 않아도, 옷을 입혀주지 않아도, 애써 놀아주지 않아도 저렇게 혼자서 크고 당당하게 자란 나무가 어린 저에게는 무척이나 신기했습니다.

어린 시절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던 그 나무가 '느티나무'였다는 것은 나무가 죽고 나서였습니다. 10년 전쯤 공터 주변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놀이터였던 공터는 인도 블록과 시멘트로 새 단장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크고 당당했던 '느티나무'는 줄기에 생기가 없어지고, 입도 누렇게 변하더니 점점 메마르면서 죽었던 것입니다. 나무의 죽음이 못내 아쉽고, 아팠던 저는 그 때서야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봤던 것입니다.

저는 느티나무의 죽음을 보면서 사람에 의해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막연하게나마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느티나무가' 죽고 다시 10년이 흐른 지금, 저는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통해 또 다른 '느티나무'를 만났습니다.

느티나무처럼 아이들도 스스로 배우고 익힌다

이 책은 '느티나무어린이도서관' 박영숙 관장이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을 키워가면서 겪은 일상을 엮은 책입니다. 일상이라고 해서 가볍게 읽고 지나칠 내용은 결코 아닙니다. 박영숙 관장은 도서관 일상을 진지한 성찰과 따뜻한 사랑으로 관찰하면서 아이들이 어떤 존재이며,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환경이 필요한지 말하고 있습니다.

박영숙 관장은 아이들에겐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있고, 이 호기심은 아이들이 스스로 배우고, 깨치는 원동력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굳이 아이들을 책 앞에 끌어 앉히거나, 애써 무엇인가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저 역시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볼 때면 아이들이 스스로 배운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도서관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꾸준히 놀다보면 자연스럽게 책을 뽑아서 읽게 됩니다. 또 이 책꽂이에는 이런 비슷한 내용의 책들이 몰려서 꽂혀 있고, 다른 책꽂이에는 또 다른 비슷한 내용의 책들의 몰려서 꽂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도서관의 주제별 분류체계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류체계를 알게 된 아이들은 자신이 보고 싶거나 궁금한 내용을 알아서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제 기억 속에 느티나무가 스스로 건강하게 성장했듯이 아이들 역시 스스로 지적, 정서적 성장은 물론 학습능력까지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른의 가치관과 기준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아이가 스스로 교육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른의 판단대로, 욕심대로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치려고 합니다. 또 그 가르침을 아이들의 거부하거나 잘 따르지 않을 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실망감을 표시하거나 화를 냅니다.

박영숙 관장은 어른들의 이러한 행동은 아이들을 일정한 틀에 가둠으로써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또 잠재력을 일깨우기보다는 계속해서 잠재우는 결과를 낳거나 교육효과를 반감시킬 수도 있다고 합니다. 마치 제가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놀이터에 어른들이 효율성과 깔끔함을 위해 아스팔트를 깔고, 시멘트로 정비한 결과 느티나무가 죽어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나아가 박영숙 관장은 어른들은 아이가 스스로 깨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아이가 깨쳐나가는 방법과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믿음'과 '존중'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뛰어놀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듣고 '그렇다면, 아이를 방치하거나, 무관심해지란 말인가?'라고 반문할 어른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른이 해야 할 역할이 분명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대하고, 아이가 자유롭게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제공해야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한 최적의 교육환경...도서관

과연 아이를 위한 최적의 교육환경이 무엇일까요? 바로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에는 아이들이 수시로 다양하게 발생하는 지적 호기심을 즉시 해결 할 수 있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단지 책이 많이 있다고 해서 도서관이 최적의 교육환경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도서관, 특히 어린이도서관은 아이들이 모이는 공간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놀면서, 부딪치면서 사회성과 도덕성을 기르게 됩니다. 가령 도서관에는 많은 책이 있지만 같은 책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즉 어떠한 책을 여러 아이들이 읽고 싶어 할 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기다림과 양보라는 미덕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도서관은 모든 아이들이 편견과 선입견 없이 평등해 지는 공간입니다. 학교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기죽어 있던 아이들은 도서관에 와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그 자신감은 스스로 무엇인가 해보려는 의욕과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도서관이 아이들을 위한 최적의 교육환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부모들은 교육에 대한 심각한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교육비 걱정은 물론, 지금하고 있는 교육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다른 부모처럼 내 자식에 무언가 해줄 수 없을 때 상대적 박탈감과 자괴감에 휩싸이게 되거나 '혹시, 우리 아이가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또 다른 불안감을 가지게 됩니다.

박영숙 관장의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는 '교육'이라는 말만 들어도 걱정과 불안부터 앞서는 부모들에게 힘을 주는 책입니다. 흔히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면서 '남들도 하니깐 어쩔 수 없이', '남들이 안하면 나도 안하겠는데'라고 합니다. 이 책은 남들이 다 해도 자신만은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저의 추억 속에 느티나무가 따뜻한 햇볕, 비옥한 땅, 맑은 공기와 같은 자연환경 속에서 스스로 자라 저에게 든든한 친구와 우산이 되어주었듯이 우리 아이들 역시 따뜻한 사랑과 자유로움이 보장되는 교육환경 속에서 스스로 '자연스럽게' 배우고, 자라서 누군가에게 든든한 친구가 되고, 우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믿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