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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하철서재] 어르신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18-04-15 조회수 : 112

[경기도지하철서재] 어르신


지하철서재에서 참 많은 어르신을 뵈었다. ‘어르신'이란 원래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고 남자에게만 썼다 하는데 요즘은 노인이란 말을 대체해 더 넓게 쓰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남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어놓았다. 지금 내가 말하려는 어르신은 모두 여자분들이다. 같은 여자여서 그랬는지, 선선히 말을 붙이고 또 받아주셨다.  


지난해 8월 27일 개관 사흘째 정자역 서재. 두시 반경이었다. 옆 의자에 앉아 계신 어르신이 여기 일을 보느냐, 좋은 책이 많다고 말을 거신다. 해방 되던 해 열세 살이었다고, 더 나이 먹었으면 정신대에 끌려갔을 거라 하신다. 여든넷이신데 음성에 기운이 있다. 댁이 네이버사옥 바로 옆이어서 평소 네이버도서관을 애용하는데, 그전 살던 동네 성당에 다녀오다 쉬어 가시는 참이었다.  <노년의 의미> <황혼길 서러워라>를 골라 펴들어 보며 책이 참 좋다는 말을 여러 번 하신다.

“기댈 데가 없어서 좀 불편해.”

풍이 와서 목과 등이 약간 굳어져 불편을 느끼셨다. 오래 앉아 있자니 의자가 몹시 불편하다, 책을 보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겠나, 노인을 배려하려면 등받이를 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시다.

큰글씨책을 보여 드리니 눈은 아직 문제없다 하시고, 손에 든 책을 들어 보이며 책 한 권도 노인한테는 무겁다고 일러 주신다.

여러 군데와 의논을 해야 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고 뜻대로 다 할 수 없다고 여쭈니 고개를 끄덕이곤, 의자를 기부받아라, 건의할 때 안전 문제를 우선 얘기해라, 노인이 쓰러져 속된 말로 머리라도 깨지면 난리 나지 않겠느냐고 하면 들어줄 거라고 자상히 귀띔해 주셨다.

무척 건강한 분이라 여겼는데 그 정도까지 불편하시다니. 예전에 130세 정정한 스웨덴 할머니가 방송에 출연해 정부의 노인정책에 대해 비평하던 게 떠올랐다. 절대 다 른 사람 몸은 될 수 없으니, 겉보기로 알은체해선 안 되겠다.


같은해 10월 9일 11시 지나서 정자역 서재. 팔순을 바라보는 어르신 두 분. 한 분이 낭독회를 하느냐고 묻는다. 낭독회 포스터를 보신 것. 낭독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여 종이에 즐기는 시를 적어서 지니고 다니기도 하는데 낭독회를 한다니 참가하고픈 생각이 드셨던 거다. 노트에서 찢어낸 종이에 조병화 시인의 시 적은 걸 보여주셨다. 여백에 “정호승 봄길”이라고도 적혀 있었다.

무덤덤하게 딴데를 보던 친구분이 입을 떼신다.

“우리 때 소월 시를 외고 했지.”

“요즘은 뭘 외도록 배우질 못해서 시 한 줄 못 외워요.”

“우리도 외우게 해서 왼 게 아니고 자꾸 읽다 보니 외졌지.”

“예, 소월 시는 멜로디 있는 노래 같아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끄덕 하신다.

두 분은 성향이 다르신 게 차림새와 표정에서 바로 느껴졌다. 먼저 말을 건 분은 모르는 이에게 말을 꺼낸 행동이 스스로 민망한 듯 수줍어했고 친구의 눈도 의식하는 눈치셨다. 그런데도 낭독할 기회를 몹시 바라시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행사가 있을 때 연락 드리면 낭독해 주시겠느냐 물으니 얼굴이 환해지신다. 용인 사는 분들로 이곳을 자주 오가지는 않으나, 친구분들과 약속장소로 삼을 정도면 아주 먼 거리는 아닐 듯했다.

소싯적 감성이 시들지 않은 어르신은 “어쩌면 이렇게 멋지게 했어요. 이 전등들에 책들 하며 누군지 세련된 사람이 꾸몄어.” 달콤한 말씀을 한참 해주셨다. (아쉽게도 그분의 낭독을 들을 자리를 여태 만들지 못했다.)


10월 24일 정자역 서재 11시 지난 시간. 나중에 69세라 알려주신 어르신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열중해 읽고 계셨다. 시간이 제법 흐른 듯하여 “힘들지 않으세요? 빌려가 읽으셔도 되는데요.” 하니 “얼마에요?” 하셔서 설명을 드렸다.

그 책 저자인 영문학자 장영희 얘기 끝에 “에세이가 좋아, 꾸민 얘기는 싫어.” 하신다. 일단 말문이 열리자 다변이셨다. 젊은 시절 처음 이성에 설레본 날 기억을 생생히 들려주고 결혼해 자녀를 키운 이야기까지 청산유수 막힘이 없으시다. 친구들은 사회 활동을 활발히 했으나 당신은 평생 주부 노릇에 충실한 ‘우물 안 개구리’였다며 조금 아쉬운 심경을 비추기도 하셨다.   

책 얘기를 하실 때 무척 활달하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사회생활 경험은 적은 대신 무슨 일이 닥치면 책에서 정보를 섭렵해, 가령 병원 진료를 받더라도 당신 주관에 따라 현명하게 대처한 분이셨다. 지금은 당뇨에 관한 책을 찾으신다기에 <20년 당뇨 이렇게 극복했다>란 큰글씨책이 기억 나 찾아보았으나 마침 대출중이었다. “기록을 찾아서 언제 반납할지 알아볼 수 없냐.”고 기어이 연락처를 남겨주고 가셨다.

평탄한 인생은 있을지언정 이야기 없는 인생은 없다.  


12월 19일 모란장에 같이 가려고 지하철서재에서 만나신다는 세 어르신을 잊을 수 없다. 먼저 온 한 분은 과묵한 인상이었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를 상대로 얼마 전 외국 다녀온 일이며 손자들 얘기를 은근한 열의로 들려주셨다.

삼십 분이 훌쩍 지나 마침내 두 분이 더 오셨다. 장보는 일보다 동무들 만나는 게 주목적이었는지 세 분이 서재에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이가 가장 적은 분이 호일에 싼 고구마를 꺼내자, 먼저 계셨던 어르신(나이로는 가운데셨다.)이 말상대하느라 애썼다고 반을 잘라 주셨다. 뜨끈뜨끈했다.

“모란장에 가면 뭐 하세요? 저는 어려서 한 번 가본 기억이 어렴풋한데요.”

내 말에 막내분이 쿡쿡 웃더니 재미난 볼거리를 보여준다며 전화기를 만지신다. 아까 그 가운데언니가 나를 가리키며 이런 분을 물들이면 안 되지 하시기에 ‘저도 알 건 아는 나이’라고 졸랐다. 모란장 각설이가 음담패설하는 장면이다. 재미난 대목을 줄줄 외시기도 한다. 내가 깔깔깔 웃으며 좋아하니, 동무들과 카톡으로 주고받는 우스갯거리를 보너스로 보여주셨다. 일종의 야한 ‘움짤'이었다.  

두 언니들은 점잖은 웃음을 머금고 지켜본다. 둘째인 앞의 어르신이 댁에서 아들이 전화기를 주며 문자 왔다고 하면 방에 들어가 몰래 본다고, 살짝 거드신다.

자매 같은 세 동무가 참 좋아 보였다. 나도 친구들과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2018.3.15)

 

* 이 글은 지하철서재를 매주 순회 방문하며 일하는 글쓴이가 서재에서 보고, 듣고, 만나고, 생각한 것을 적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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